미국의 포드자동차 이야기
강홍구, 2020년 12월 07일
이번 이야기는 100년 동안 자동차의 역사를 함께하고, 유서 깊은 자동차 명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포드자동차(Ford Motor Company)의 이야기입니다. 포드자동차는 미국 자동차 시장을 리딩하는 디트로이트의 3대 자동차 메이커였으며, 미국의 자동차 시장에서 연속 75년간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 다음으로 판매량 순위 2위에 올랐던 자동차 제조회사입니다.
포드자동차의 설립자, 헨리 포드
헨리 포드(Henry Ford)포드자동차의 설립자는 헨리 포드(Henry Ford)입니다. 그는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중반을 살았던, 자동차 역사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로서, 미국의 자동차 대중화를 이끈 기술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서쪽의 농촌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농업 노동의 합리화와 운반의 개선을 위해 기계기사를 지망했습니다. 디트로이트의 작은 기계 공장에 들어가 종사하며 기술을 배워왔습니다. 5년 후, 그는 고향에서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돌보면서 공작실을 만들어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1890년에는 에디슨 조명 회사 수석 기술자로 초청되어 근무하던 중 2기통 4마력 가솔린 엔진을 탑재한 쿼드리사이클(Quadricycle)을 개발해 자동차 산업으로 뛰어들 준비를 했습니다.
이후 헨리 포드는 11명의 직원과 함께 디트로이트 포드모터컴퍼니(Ford Motor Company)를 설립하여 자동차를 생산했습니다. 하지만, 소수의 인원이 수작업으로 작업을 하는 것만으로는 하루 생산량이 매우 적다는 한계점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보다 효율적이며 제품 신뢰성을 높이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마침내 1903년에 최초의 양산 대중 자동차 포드 모델T형의 제작을 시작했습니다. 포드 모델T형은 세계 자동차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당시 생산되던 자동차보다도 효율적인 생산이 가능했으며, 값싸고 내구성까지 뛰어난 자동차의 대중화를 이끌었습니다. 이 모델T형은 1927년까지 생산되어 18년 동안 무려 1,500만 대나 판매되었습니다.
포드 모델T의 통합생산라인헨리 포드의 경영원리 철학은 4개의 봉사원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는 미래에 대한 공포와 과거에 대한 존경을 버릴 것, 경쟁을 위주로 일하지 말 것, 봉사가 이윤에 선행할 것, 값싸게 제조하여 값싸게 팔 것 등입니다. 이렇듯 자동차의 가격은 일반 노동자나 서민들이 구매할 수 있을 만큼 저렴해야 한다는 헨리 포드의 철학에 기반하여 가격은 기존의 판매되던 자동차의 절반이 되지 않는 금액으로 판매되었습니다. 특히, 모델T형을 생산하면서 통합생산라인을 구축하여 1대당 12시간씩이나 걸리던 제조 시간을 1.5시간으로 줄이는 혁신을 일구어냈습니다. 이 시스템은 자동차 1대를 조립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평균 750분에서 93분으로 단축시켰으며, 1908년에는 1대당 60분으로 더욱 단축시켰고, 1914년에는 무려 24초에 1대가 만들어질 정도로 개선되었습니다. 향후 이 통합생산라인은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이라고 불리며 현대 산업사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20세기 초에는 링컨(Lincoln) 브랜드를 자회사로 편입시켰고, 1929년 경제대공황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델A를 500만 대 가까이 판매하여 거대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그동안 쌓아온 기술력과 자금력을 바탕으로 대량 양산 및 상업용 독자 엔진인 포드 V8 엔진을 개발하였습니다.
포드 가문의 경영권 승계
헨리 포드 2세 뒤로 에드셀 포드와 헨리 포드 초상화헨리 포드에게는 외동아들인 에드셀 포드(Edsel Ford)가 있었습니다. 헨리 포드는 25세가 된 아들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후견인으로서 실권을 계속 행사하였습니다. 에드셀 포드는 명목상의 사장에 불과했으며, 헨리 포드는 형식적으로만 은퇴한 셈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이 회사 내에 알려지자 에드셀 포드의 권위와 포드의 미국 자동차 시장의 점유율은 곤두박질치게 되었습니다. 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헨리 포드의 외동아들인 에드셀 포드가 암으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헨리 포드의 손자인 헨리 포드 2세는 해군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 중이었습니다. 이렇게 헨리 포드는 1943년 80세의 나이에 다시 부득이하게 대표에 취임해 경영 일선에 복귀하였습니다. 헨리 포드는 그의 손자에게 회사를 물려줄 것을 결심했습니다. 결국, 손자인 헨리 포드 2세는 해군을 전역하여 회사 경영팀에서 2년간 경영수업을 받은 뒤 1945년에 회사를 물려받았습니다. 손자에게 회사를 물려주었던 헨리 포드는 2년 후인 1947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헨리 포드 2세도 자신의 아들인 에드셀 포드 2세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었습니다. 그 결과 창업자인 헨리 포드에서 시작하여 증손자인 에드셀 포드 2세에게까지 경영권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포드자동차의 전성기
포드 머스탱(Ford Mustang)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포드는 지프차로 알려진 GP와 GPW를 개발하여 연합군에 37만여 대를 납품하는 성과를 이루어냈습니다. 향후, 이 모델은 SUV 모델 개발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미국의 상징이라 불리는 픽업트럭과 F 시리즈를 개발하여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포드는 자동차만 만들던 기업이 아니었습니다. 1954년부터 탑승객의 안전을 위해 3만 회가 넘는 충돌 테스트를 진행하여 자동차 설계에 적용하였고, 차량 안전의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1960년대에는 포드 머스탱이 출시되어 많은 청년층의 인기도 끌었습니다. 영화에서도 다루었던 지옥의 레이스 르망24를 지배한 포드GT40으로 수준 높은 기술력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에는 고유가 시대에 맞추어 소형 플랫폼을 개발했으며, 포드 에스코트를 개발하여 전 세계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베스트셀러로 자리잡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인기 모델인 포드 토러스도 이 시기에 등장했는데, 각진 모양의 기존 자동차 디자인을 탈피한 첫 번째 자동차로 널리 알려져 있는 모델입니다. 토러스의 디자인은 당시에 혁명을 일으켰고, 전륜구동과 자동차 품질의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는 포드의 신차 전성기였습니다. 익스플로러, 몬데오, 레인저 EV 등 다양한 모델들이 출시되었습니다. 이 시기 포드는 볼보(Volvo) 자동차를 인수하여 안전기술 측면에서 시너지를 발휘했으며, 얼마 후 재규어(Jaguar)와 랜드로버(Land Rover)도 인수하여 포드의 자회사로 만들어 기업 규모를 더욱 키웠습니다. 하지만,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몸집 불리기를 멈추고 경영 안전성을 위해 볼보는 중국의 지리자동차(吉利汽车)에, 재규어 및 랜드로버는 인도의 타타자동차(Tata Motors)에 매각하였습니다.
1990년대 이후 포드는 전자장치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까다로운 미국의 연비 규제에 맞추기 위해 에코부스트 엔진을 개발하면서 128개의 특허 및 특허출원을 했습니다. 포드의 에코부스트 엔진은 고효율 및 친환경 엔진으로 자동차 제조사들이 추진하고 있는 다운사이징에 적절히 대처하여 기업 성장세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자동차는 포드의 머스탱(Mustang)입니다. 머스탱은 V6, 3.7L 엔진을 사용했지만, 에코부스트 엔진을 사용하면서 2.3ℓ로 배기량이 크게 줄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최고출력은 약간 상승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친환경 및 고효율의 엔진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또한 앞선 기술력을 바탕으로 듀라토크(DuraTorq) 디젤엔진을 개발했으며, 푸조-시트로엥(PSA)의 메인 엔진인 HDi 엔진 개발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포드 VS 페라리
르망24시 경주대회(The 24 Hours of Le Mans)
초창기의 포드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 영화로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이 영화가 바로 실화를 바탕으로 한 ‘포드 V 페라리’라는 영화로, 자동차 마니아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봤다는 지옥의 레이스 르망 레이싱 출전기를 담아낸 영화입니다. 1960년대 자동차 모터 스포츠 대회는 페라리와 포르쉐 등 유럽 메이커들의 독무대였습니다. 페라리(Ferrari)는 유럽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르망24시 경주대회(The 24 Hours of Le Mans)에서 절대강자였습니다. 1923년부터 시작한 르망24시는 프랑스 르망 인근의 라 샤르트에서 매년 6월에 열리는 대표적인 내구경주 대회였습니다. F1 그랑프리가 정해진 트랙을 최단 시간에 완주하는 것이라면, 르망24시는 24시간 안에 트랙을 얼마나 많이 완주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었습니다. 3명의 드라이버들이 교대로 13.629km의 트랙을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레이싱을 펼치며 내구성과 스피드를 겨루게 되었습니다. 페라리는 이 무대에서 1960년부터 1965년까지 무려 6년 연속 정상을 차지하였는데, 이때 페라리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 바로 포드 GT40 모델이었습니다. 포드 GT40 모델은 V형 8기통 엔진을 장착했고, 배기량은 모델에 따라 4.2ℓ, 4.7ℓ, 7ℓ 등이었습니다. 배기량은 4,736cc에 최대 속도는 4.7ℓ 엔진의 마크I(Mark I)형은 시속 264㎞, 7.0ℓ 엔진을 단 마크 II형은 시속 320㎞에서 330㎞에 달했습니다. 또, 서스펜션은 더블 위시본 형식으로 4개의 바퀴에 장착된 11.5인치 디스크 브레이크 덕분에 제동력이 무척 뛰어났습니다. 디자인은 기존의 미국산 자동차와는 달리 곡선과 곡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연하고도 우아한 느낌을 전달하여 미래지향적 스타일을 자랑합니다. 포드는 1962년을 전후로 유럽의 르망24시 경주대회 참여를 본격 타진했습니다. 그러나, 르망24시 등의 내구 레이스 분야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기술력에도 심각한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당시, 기존의 업체와 합작을 타진하면서 대상이 된 메이커가 르망24시를 주름잡고 있던 페라리였습니다.
엔초 페라리(Enzo Ferrari)페라리의 설립자는 엔초 페라리(Enzo Ferrari)입니다. 그는 평소 유명한 독설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로 여러 가지 일화들이 존재합니다. 경쟁사인 람보르기니(Lamborghini)는 ‘페라리 250’의 품질 문제를 지적하러 페라리를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엔초 페라리로부터 트랙터나 만들라는 독설을 듣게 되었는데, 람보르기니가 세워진 역사를 생각해보면 페라리의 자존심과 자부심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또, 레이싱 경주에만 몰두하여 모든 자금을 레이싱에만 쏟아부었습니다. 그 결과 회사의 큰 자금난으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1959년부터 페라리는 피아트(FIAT)의 재정 지원을 받아 왔으며, 1969년 초에 피아트가 페라리의 지분 50%를 인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포드와의 협상이 끝나고 6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포드 GT40의 탄생
포드의 GT40 모델당시 매출 감소로 고민하던 포드는 내부적으로 자금 압박을 받고 있던 페라리의 엔초 페라리에 지분 매입을 통한 합작을 제안했습니다. 두 회사 간 협상은 1963년 4월 말부터 22일 동안 치열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자동차 경주에 대한 집념이 남달랐던 엔초 페라리는 합작을 제안한 포드에 몇 가지 쉽지 않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포드가 받아들일 수 없는 힘든 조건이 있었습니다. 이는 레이싱에 참여한 페라리 차량에 포드 브랜드가 아닌 페라리 브랜드를 내걸어야 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당연히 포드는 이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고,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페라리의 기술을 등에 업고 르망24시의 맨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던 포드의 야망도 무너지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포드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으며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르망24시를 제패하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포드는 곧바로 모터 스포츠 기술이 가장 뛰어난 영국 자회사인 포드 어드밴스드 비히클(Ford Advanced Vehicle)을 설립하여 연구 인력과 자금을 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르망24시 경주대회에서 1, 2, 3위를 모두 차지한 포드자동차
포드는 페라리를 잡기 위해 영국에 기반을 둔 업체들을 탐색하기 시작했습니다. 로터스(Lotus)와 쿠퍼(Cooper), 롤라(Lola) 등과도 제휴를 타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포드는 F1에 집중했던 로터스와 쿠퍼가 아닌 롤라사와 힘을 모으기로 하고, 영국 포드 기술 팀장인 영국인 로이 런(Roy Lunn)이 롤라사의 사장이자 기술자인 에릭 브로들리(Eric Broadley)와 합작을 제안하였습니다. 이에, 포드 GT40의 모체가 된 롤라GT를 제작하였고, 포드 GT40은 롤라GT를 토대로 차체가 낮고 세련된 유선형 디자인으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르망24시 경주대회 우승
마침내 날을 벼르고 있던 포드는 1964년에 포드의 구겨진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비장의 카드인 GT40을 언론을 통해 외부로 처음 공개하였습니다. 차체 중앙에 엔진을 둔 미드십 차량인 GT40은 장거리 여행에 적합한 고성능 스포츠카를 이르는 GT와 전체 높이가 40.5인치라고 해서 40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GT40은 그간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첫 번째 참가한 뉘르부르크링(Nurburgring) 경주와 첫 출전한 르망24시 경주에서 완주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포드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GT40의 엔진을 7.0ℓ 엔진으로 변경했습니다. 마침내 1966년 6월에 포드의 GT40은 페라리를 꺾고 1, 2, 3위를 모두 차지하여 미국 레이싱 역사를 대표하는 명장면으로 길이 남게 되었습니다. 당시, 선두차량은 2번을 단 브루스 맥라덴(Bruce McLaren)과 크리스 에이먼(Chris Amon)이었습니다. 이렇게 르망24시 경주의 우승을 안겨준 GT40은 포드의 자랑이자 미국의 자존심을 세워준 기념비적인 모델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2004년에는 이를 기반으로 포드GT(Ford GT)라는 이름의 모델을 발매하여 4,000여 대를 생산하기도 했습니다.
르망24시, 그 이후
포드의 독주를 막은 것은 페라리가 아니라 포르쉐(Porsche)였습니다. 1966년부터 1969년까지 4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 포드는 지금까지도 미국 자동차 제조사가 르망에서 우승한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또, 비유럽권 제조사의 르망 우승은 포드, 마쓰다(Mazda), 토요타(Toyota) 등 3곳뿐입니다. 1970년 917K로 사상 첫 1위를 기록한 포르쉐는 2017년까지 총 19번의 우승컵을 거머쥐며, 르망24시 경주대회 최다 우승자로 올라섰습니다. 아우디는 13승으로 2인자를 차지하였고, 페라리는 총 9회의 우승을 기록하였습니다.
포드는 1960년대의 르망24시 경주대회 우승과 머스탱의 성공을 기반으로 본격적인 성장세를 이어나갔습니다. 회사는 북미 지역을 넘어서 유럽까지 사세 확장을 나섭니다. 결국, 1967년 포드는 영국과 독일 및 아일랜드 지사를 합병하고, 유럽 현지 생산 체계를 확립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럽 포드의 시초입니다. 1970년대 이후, 포드는 코티나, 그라나다, 피에스타, 에스코트 등을 선보이는 등 유럽 시장에서 빠르게 점유율을 높이며 유럽 사업의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는 아시아 지역으로도 손을 뻗었습니다. 1979년에는 일본 마쓰다 지분을 인수했고, 1986년에는 한국 기아자동차의 지분을 사들이며 아시아 지역 내의 협력 관계를 구축하였습니다. 1989년부터는 애스턴마틴, 재규어, 랜드로버, 볼보 등을 그룹에 합류시켰지만, 2007년 금융위기를 맞아 순차적으로 브랜드를 매각하였습니다. 이후 포드는 변화하는 자동차 시장에서 한발 앞서서 전기자동차와 자율주행 자동차 시장에 대응하고 있습니다.
포드의 고급 브랜드
포드 회사 내의 조직부서인 프리미어 오토모티브 그룹(PAG)은 1999년에 고급 자동차 시장의 비즈니스 운영을 감독하기 위해서 설립되었습니다. 링컨, 머큐리, 재규어, 랜드로버, 애스턴마틴, 볼보 등 6개의 고급 브랜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그룹은 2008년에 글로벌 금융위기가 오기 전까지 영국 런던에서 본부를 운영했습니다. 또, 포드는 15년 동안 프리미어 오토모티브 그룹을 만들고 발전시키는데 약 170억 달러를 썼다고 합니다.
(1) 링컨
링컨(Lincoln)링컨(Lincoln)은 미국의 자동차 제조사 포드의 럭셔리 브랜드이자 캐딜락과 함께 미국 프리미엄 브랜드의 양대 산맥 중 하나입니다. 또, 20세기부터 성공한 사람이 타는 고급 자동차의 아이콘이며, 우아함과 품격을 갖춘 대표적인 아메리칸 클래식으로 미국에서 사랑과 지지를 받는 브랜드입니다. 링컨은 헨리 리랜드(Henly Leland)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미국의 링컨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1917년에 정식 설립했습니다. 하지만, 계속된 경영악화와 막대한 부채가 발생하여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결국, 링컨은 1922년 포드에 의해 인수되었고, 헨리 리랜드는 링컨 브랜드가 편입된 이후에도 줄곧 포드의 럭셔리카 개발을 담당했습니다. 1920년대 링컨은 프리미엄 아메리칸 럭셔리카로 독자적인 입지를 굳게 다졌습니다.
링컨 타운카 (Lincoln Town Car)
포드의 주문 제작 차량 중에서도 단연 가장 유명한 모델은 포드의 대표인 에드셀 포드가 자신의 아버지인 헨리 포드를 위해서 제작한 1922년 링컨 타운카(Lincoln Town Car)입니다. 타운카의 이름은 운전석이 외부로 노출되어 있고 승객석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차체 디자인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링컨 타운카는 자동차를 교통수단이 아니라 고귀한 지위의 상징으로 끌어올리는 모델이었습니다. 당시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 W.C 필즈(W.C. Fields), 허버트 후퍼(Herbert Hoover)와 같은 저명인사들이 링컨을 애용했습니다.
링컨 컨티넨탈 (Lincoln Continental)링컨의 대표 브랜드 중 하나인 링컨 컨티넨탈(Continental)은 포드의 대표 에드셀 포드가 1938년 파리 여행 중 유럽의 자동차를 보며 받았던 느낌을 반영하여 자신이 타고 다닐 자동차로 제작한 것입니다. 이를 본 주위의 반응이 너무 좋아서 양산하여 제작된 자동차입니다. 에드셀 포드는 신차인 링컨 컨티넨탈 개발을 진두지휘하여 고객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습니다. 링컨 컨티넨탈은 깔끔한 디자인과 역동적이고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였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는 독일과 일본 고급 차들에 밀려 입지를 잃었고, 포드의 혁신을 이끌어가던 럭셔리 브랜드였던 링컨은 독자 브랜드 자리도 내주었습니다. 결국, 재규어와 볼보 등이 소속된 포드 산하의 프리미어 오토모티브 그룹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링컨은 컨티넨탈 등 차량을 라인업에서 지우고 내비게이터 등 새로운 차량을 개발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2002년 비슷한 침체기에 있던 캐딜락의 부활 조짐이 보이자 포드는 링컨 브랜드를 다시 부활시켰습니다. 2000년대 중반에는 중형 스포츠 세단인 제퍼(MKZ)를 출시하는 등 지금까지도 MK 라인업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2) 머큐리
머큐리(Mercury)
머큐리 세이블(Mercury Sable)
머큐리(Mercury)는 1938년에 에드셀 포드가 설립한 포드의 준고급 브랜드입니다. 링컨과 포드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그 사이에서 중간단계 역할을 하는 브랜드입니다. 초기에는 포드 머큐리라는 최상급 모델로 제작되었지만, 포드와의 차별성도 없고 고급 브랜드로서의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1960년대에는 ‘남자들의 차’라는 슬로건을 내걸며 인기를 끌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포드와 기아자동차가 협업하여 머큐리 세이블(Mercury Sable)을 판매했습니다. 머큐리 세이블은 머큐리의 마퀴스(Marquis)를 대체하기 위한 중형급의 세단 및 에스테이트로 설계된 자동차입니다. 미국 시장에서 포드 토러스의 고급화 버전의 모델로 통했으며, 미래지향적인 디자인 및 준수한 품질과 성능으로 인기를 끌었던 자동차입니다. 미국에서 판매된 머큐리 세이블은 총 3종의 가솔린 엔진과 2종 자동변속기를 탑재했으며, 단 3개월 동안 493대를 판매했고, 1990년대에는 1,579대를 판매하여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가장 안 팔리는 자동차로 상황이 악화되어 판매량 부진과 하락세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결국 2011년 1월 4일을 마지막으로 준고급 브랜드였던 머큐리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3) 재규어와 랜드로버
재규어(Jaguar)
랜드로버(Land Rover)
포드는 1990년에 재규어(Jaguar Cars)를 인수하고, 2000년에 랜드로버(Land Rover)를 인수하여 두 회사를 2008년까지 보유했습니다. 재규어는 1922년에 윌리엄 라이언스(William Lyons)와 그의 친구들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설립 당시에는 스왈로우 사이드카(Swallow Sidecar Company)라는 이름이었고, 오토바이 옆에 붙이는 사이드카를 제작했습니다. 1922년에 사이드카가 아닌 자동차를 내놓으면서 이름을 재규어로 바뀌었습니다. 1965년에는 재규어의 바디를 전부 공급하던 철강회사인 프레스드 스틸(Pressed Steel)이 영국의 자동차 회사인 BMC에 인수되었으며, BMC는 재규어도 넘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철강 문제와 마땅한 후계자도 없었던 윌리엄 라이언스는 BMC와 합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결국, 1966년에 새로운 지주회사인 BMH가 만들어졌습니다. 1968년에는 영국 정부가 나서서 BMH에게 버스와 트럭을 생산하던 회사인 레이랜드(Leyland Motor Corporation)를 인수하라고 압박을 가했습니다.
이렇게 출범한 것이 BLMC였고, 랜드로버도 이곳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합병은 실패하여 브랜드 일부를 영국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행정부의 민영화 플랜에 따라서 분리하기 시작했고, 1984년에 재규어가 상장회사로 분리되어 나왔습니다. 독립한 재규어는 존 이건(John Egan)의 경영하에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존 이건은 판매보다는 품질관리와 인도기일 엄수 및 생산성 향상에 주력했습니다. 당시 약 1만 명의 인력 중 3분의 1 정도를 정리했습니다. 그러나, 재규어는 포드가 1990년에 인수한 후에는 이익을 내지 못했고, 이후 재규어와 랜드로버 두 브랜드는 소비자 신뢰도 면에서 업계 최저를 기록했습니다.
재규어 XK (Jaguar XK)재규어는 포드 산하의 프리미어 오토모티브 그룹에 편입된 이후, S타입을 출시하면서 재기에 성공할 것으로 보였지만, 유럽의 전략형 승용차 포드 몬데오(Ford Mondeo)와 플랫폼을 공유했던 X타입의 상업적 실패로 인하여 또다시 부진의 늪에 빠졌습니다. 또, 기존 제품군의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품질 문제로 인해서 여의치 않기도 했습니다. 이런 재규어에게는 참신함과 혁신성으로 시선을 사로잡아 기업의 쇄신을 보여줄 신차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바로, 디트로이트 모터쇼의 재규어 부스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쿠페형 컨셉트카를 선보였습니다. 이 쿠페는 당시 클래식한 이미지의 재규어에게서 믿기 어려울 만큼 현대적인 스타일링과 정교함을 선사했습니다. 이 컨셉트카의 이름은 어드밴스드 라이트웨이트 쿠페(ALC)이며, 가벼운 몸무게를 가진 2+2 구성의 그랜드 투어러(GT)입니다. 이 컨셉트카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XK(X150)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레인지로버(Range Rover)레이랜드는 1994년에 사륜구동 자동차 전문 회사인 랜드로버도 비엠더블유(BMW)에 매각했습니다. 랜드로버의 디자인은 지프를 벤치마킹한 것이고, 영국의 문화 아이콘 중 하나입니다. 1970년에는 세계 최고급 SUV라는 명성을 누리게 했던 대표작인 레인지로버(Range Rover)를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레인지로버 클래식으로 알려진 이 1세대 자동차는 사륜구동 모델 최초로 ABS 브레이크와 에어서스펜션 및 전자식 트랙션 컨트롤 시스템을 탑재했습니다. 향후, 25년간 끊임없는 지속적인 기술 개발과 진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2000년 BMW는 랜드로버를 포드에 매각했고, 포드는 2008년에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재규어와 랜드로버를 인도의 타타그룹(Tata Group)에 매각했습니다. 이렇게, 2013년에는 재규어 랜드로버(Jaguar Land Rover)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잠시 2019년에는 중국 시장에서의 판매 부진으로,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면서 구조조정에 들어갔습니다.
(4) 애스턴마틴
애스턴마틴(Aston Martin)애스턴마틴(Aston Martin)은 영화 007 시리즈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James Bond)의 자동차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2017년 소더비 경매에서는 1956년형 자동차 한 대가 2억2천5백만 달러에 팔리기도 했습니다. 1913년에 설립된 후에 애스턴마틴은 1925년부터 시작해서 20세기 동안 총 7번 도산한 회사입니다. 1947년에는 데이비드 브라운(David Brown)이 인수했고, 이때 DB 시리즈가 시작되었습니다. 1974년에도 법정관리에 들어갔으며, 1년 후에 미국과 영국의 투자자들에게 매각되어 공장이 재가동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장기투자할 계획이 없었던 투자자들은 1981년에 영국의 저명한 석유 사업가인 말콤 곤틀렛(Malcolm Gauntlett)에게 회사를 매각하였습니다. 이렇게 한동안 말콤 곤틀렛이 애스턴마틴을 재기시켰으며, 1986년에는 제임스 본드를 다시 불러들이는 수완도 발휘하였습니다. 1987년에는 포드가 브랜드 인수를 시작하여 1991년 인수를 완료했습니다. 또, 1993년에는 DB시리즈인 DB7은 제네바 모터쇼에서 처음 공개되어 총 7,000여 대 이상을 판매하였습니다. 전 세계에 확실하게 애스턴마틴을 알리고 이미지를 다지게 된 원동력이었습니다. 당시 DB7은 포드가 F타입 개발을 취소하면서 포드 산하의 재규어 XK8과 같은 플랫폼을 쓰는 등 유사한 점도 많았습니다.
애스턴마틴 DB7 (Aston Martin DB7)이후 애스턴마틴은 1994년에 포드로부터 적극적인 투자와 다양한 모델 개발 및 기술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고급 자동차 애스턴마틴을 볼보와 무리하게 연계시키고, 포드의 부품을 같이 사용하는 등 이해하기 어려운 실책을 거듭했습니다. 결국, 2007년에 애스턴마틴을 사모펀드를 포함한 일단의 투자자들에게 회사를 매각했습니다. 또, 2008년 이후에는 쿠웨이트의 다르 투자회사(Dar Investment), 아딘 투자회사(Adeem Investment), 영국의 사업가 존 신더스(John Sinders)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고, 포드는 지분의 일부분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5) 볼보
볼보(Volvo)
볼보 S60 (Volvo S60)
볼보(Volvo)는 스웨덴의 대표적인 기업으로, 유럽과 미국의 안전하고 튼튼한 고급 승용차를 생산하는 기업입니다. 볼보의 대표적인 자동차 세단 S90은 전체 판매량의 8%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볼보 S90은 4만 6,499대가량 판매되고 있으며, 이보다 조금 작은 S60 모델은 3세대 모델로 전체 판매량의 6%의 비중을 차지합니다. 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디자인하고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의 찰스턴 공장에서 생산하여 한국으로 수입하고 있습니다. 3만 대가 조금 넘는 수준이지만 한국에서도 인기가 좋아 길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볼보의 자동차입니다.
1999년 볼보는 상용차에 집중하기 위해서 볼보 승용차 사업부를 매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결과, 유럽의 고급 중형차에 관심을 가졌던 포드가 100% 지분으로 인수했습니다. 볼보를 인수한 포드는 기존 볼보의 후륜구동 차량들을 자사와 공유하는 전륜구동 섀시로 변경했고, 스타일링도 이전의 각진 스타일에서 매끈한 스타일로 변경했습니다. 또, 안전도는 튼튼하게 유지하는 등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글로벌 위기가 다가오자 포드는 재규어와 랜드로버를 매각하면서도 볼보는 남겨두었지만, 위기 탈출 과정에서 볼보도 매각하였습니다. 당시 스웨덴 정부는 포드가 위기 중에 도산하게 되면 스웨덴 경제에 타격을 주리라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볼보의 구조조정을 계속하던 포드는 60억 달러에 회사를 매각하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스웨덴 정부는 볼보의 국영화 및 제너럴모터스(GM)의 사브(SAAB)와 함께 구제금융을 제공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고려했습니다. 포드가 볼보를 인수하기 전의 주인이었던 AB볼보도 포드와의 제휴를 위해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방안을 검토했습니다. 하지만, 2010년에 중국의 지리자동차(吉利汽车)가 결국 15억 달러에 볼보 승용차 사업부를 인수하면서 사건은 종결했습니다.
전기자동차 및 자율주행 시장
포드는 전 세계 자동차 메이커들보다 가장 발 빠르게 전기자동차 시장에 대응하고 있습니다. 2019년 11월에는 페이턴트사이트(PatentSight)를 이용한 디지털 기술 측면에서의 혁신적인 글로벌 기업들이 보유한 특허기술 역량에 랭킹을 매긴 ‘디지털 혁신 기업 TOP 100’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포드는 불과 1년 만에 자동차 분야 랭킹이 다섯 단계나 뛰어오른 것입니다. 특히, 자율주행 자동차 분야에서 선두를 달렸고, 그 뒤를 폭스바겐 그룹과 토요타 및 보쉬 등이 따르고 있습니다. 포드가 구축한 디지털 분야의 특허 포트폴리오도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폭스바겐, 알파벳, 애플 등 다른 경쟁사들과 비교해 봐도 빠른 성장을 보인 것으로 확인된 것입니다. 포드의 포트폴리오는 2013년부터 꾸준하게 증가했으며, 질적 측면에서도 상당히 높은 성과를 거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포드는 디지털 기술 분야에서도 영향력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매년 3개 이상의 특허를 출원하고 있고, 다른 쟁쟁한 경쟁사들과 비교해 봐도 2배에서 3배 더 많은 특허를 출원하고 있습니다.
포드는 영국 런던에서 순수 전기자동차 SUV 모델인 머스탱 마하-E(Mustang Mach-E)를 공개한 바 있습니다. 머스탱 마하-E는 1회 충전으로 600km까지 주행할 수 있으며, 10분 충전으로 최대 93km까지의 주행이 가능합니다. 또, 전기자동차 라인업을 확대하기 위해서 유럽에서 판매하는 모든 자동차의 전기자동차 옵션을 제공할 것이라고도 밝혔습니다. 포드는 2024년까지 유럽 시장에 총 17종의 전기자동차를 출시하고, 2022년부터는 전기자동차의 판매 비중이 내연기관 자동차를 능가할 것이라고 합니다.
포드는 전기자동차뿐만 아니라 자율주행 분야에서도 높은 평가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2020년 6월에 포드는 모빌아이(Mobileye)의 아이큐(EyeQ) 칩과 소프트웨어를 핵심으로 하는 자사의 자율주행 기술인 코-파일럿360(Co-Pilot360) 첨단 운전자 지원 시스템(ADAS)을 발표했고, 핸즈프리 드라이빙 기술도 추가했습니다. 이 기술은 액티브 드라이브 어시스트(Active Drive Assist) 기능을 제공하며, 핸즈프리 드라이빙 기능은 일부 구간에서 운전자가 운전대에서 손을 놓고 있어도 자동차가 스스로 조향하며 주행 차로를 유지하는 기능입니다.
포드 머스탱 마하-E (Mustang Mach-E)
국제자동차기술협회(SAE)에 따르면 기준 레벨 3의 자율주행 자동차 판매가 허용되어 있는 미국 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습니다. 또, 포드는 전기자동차 제조 회사인 테슬라(Tesla)와는 달리 운전자 주의력 감지를 위해 적외선 카메라를 설치했습니다. 이 카메라는 시선과 머리 위치를 추적하여 핸즈프리 모드 및 도로에서 작동하는 핸즈온 레인 센터링 모드 등과 관련하여 운전자가 도로에서 집중할 수 있게 유도하는 기능도 있습니다. 이 포드 코-파일럿360 2.0 스탠더드 패키지는 순수 전기자동차 마하-E에 적용하였습니다. 차선유지 시스템(Lane-Keeping System)에 대한 두 가지 상향된 기능인 도로 가장자리 감지(Road Edge Detection)와 사각지대 지원(Blind Spot Assist) 기능 또한 적용했습니다.
4세대 자율주행 자동차 시범차량2020년에는 2022년에 출시할 준중형 SUV인 ‘이스케이프’의 하이브리드 모델을 기반으로 제작한 자율주행 자동차도 공개했습니다. 포드가 미국의 자율주행 기술 개발 스타트업인 아르고AI와 개발 중인 4세대 자율주행 자동차입니다. 포드는 아르고AI에 10억 달러를 투자하여 80%의 지분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4세대 자율주행 자동차는 고화질 카메라, 고감도 레이더 센서, 고급 라이다(LiDAR) 기술 등을 적용했습니다.
이상으로 미국의 자동차 대중화를 일으킨 헨리 포드부터 지옥의 레이스라고 불리는 르망24시 경주대회와 그 이후의 자동차 시장에 관해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앞으로는 폭스바겐, 포드 등 세계의 여러 쟁쟁한 기업들도 내연기관 자동차가 아닌 전기자동차와 자율주행 자동차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추세입니다. 머지않아 근 미래에는 전기자동차에게 부여되는 파란색 번호판만이 도로를 누비고, 내연기관 자동차인 초록색 번호판은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오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