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이야기
강홍구, 2020년 11월 11일
“세계 1위의 자동차 회사는 어디인가요?”라고 물으면, 모두 입을 모아 폭스바겐이라고 대답합니다. 폭스바겐(Volkswagen)은 2020년 기준으로 연간매출 4,082억 달러(약 440조원)를 기록한 세계 1위의 자동차 회사입니다. 1937년에 설립된 폭스바겐은 독일 니더작센주 볼프스부르크에 본사가 있습니다. 폭스바겐은 독일어로 국민(Volks) 자동차(Wagen)라는 뜻으로서, 모든 국민이 사용할 수 있는 자동차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폭스바겐은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사랑 받고 있는 수입 자동차 브랜드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폭스바겐은 올드비틀, 뉴비틀, 더비틀 등 딱정벌레 같은 ‘비틀’ 자동차와 7세대까지 이어져 오는 해치백의 대표 모델인 ‘골프’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독일 경제가 붕괴 조짐을 보이고 어수선해진 틈에 1933년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독일의 수상으로 집권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자가용은 사치품이었는데, 독일의 수상이 된 아돌프 히틀러는 전 국민이 탈 수 있는 보급용 차량을 선보이길 원했습니다. 그러던 중, 뛰어난 자동차 엔지니어였던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 박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여러 차례 시도 끝에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를 저녁 만찬에 초청하였습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는 오스트리아의 자동차 공학자였습니다. 그는 1931년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슈투트가르트에 자신의 이름을 따서 스포츠카와 경주용 자동차를 제작하는 회사인 포르쉐 엔지니어링 오피스를 설립했으며, 레이싱 마니아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우승컵을 거머쥔 후, 집으로부터 온 전보를 통해서 들었다고 합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의 아들 페리 포르쉐(Ferry Porsche) 역시 뛰어난 자동차 설계자였는데요.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고집불통이었던 아버지와는 다르게, 페리 포르쉐는 사업적인 수완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폭스바겐 하면, 예로부터 브랜드 인수합병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먼저, 네 개의 동그란 고리 로고로 유명한 아우디(Audi)의 인수합병으로 시작됩니다. 아우디는 1909년에 설립되었습니다. 창립자인 벤츠 엔지니어 출신의 아우구스트 호르히(August Horc)는 초창기 경주용 모델을 개발하면서 기술력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1932년에는 아우디, 데카베(DKB), 호르히(Horch), 반더러(Wanderer) 이 네 개의 회사가 하나로 뭉쳐 아우토 유니온(Auto Union)이라는 연합 회사를 설립하면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우디의 전신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아우토 유니온 생산공장의 대부분은 폭격으로 가루가 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이 이루어지면서 동독 소재 아우디 츠비카우 공장 등이 소련군에 의해 강제 몰수되는 등 가시밭길이 계속되었습니다. 아우디는 하는 수 없이 공장을 바이에른주의 잉골슈타트로 이전했고 이를 위해 미국의 유럽에 대한 경제 복구 프로그램인 ‘마셜플랜’을 통해 자금을 수혈받았습니다. 1950년대 말에는 입맛을 다시던 벤츠가 아우디의 대부분을 인수하면서 자회사로 편입시켰습니다. 이에, 폭스바겐은 1964년에 벤츠로부터 아우디의 엔진 설계 등 일부 기술력과 함께 지분 50%를 인수했고, 얼마 후 완전 인수하여, 아우디는 폭스바겐의 자회사가 되었습니다.
폭스바겐은 세아트(SEAT) 주식 75%를 인수하였고, 1990년에는 지분 99.99%를 인수하여 완전 자회사로 만들었습니다. 세아트는 스페인 브랜드로, 1950년 국립산업연구소(INI)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정확히는 1948년 스페인 정부와 은행 여러 곳의 합작이 시초가 됩니다. 이 시기 국린산업연구소가 지분의 51%, 은행 연합이 42%, 피아트가 7% 지분을 가진 구조였습니다. 세아트는 설립 초기 이탈리아 피아트 차량을 주로 생산하여 자사 엠블럼을 붙여서 판매했습니다. 1950년대 말부터 히트작 세아트 600이 등장해 1973년까지 약 80여만 대를 판매하는 기염을 토해냈습니다. 이후, 스페인 도로 위를 오가는 차량 절반 이상이 세아트일 만큼 높은 점유율을 기록했습니다. 세아트는 스페인 국민 브랜드로 자리매김하면서 흥행을 이어나갔습니다. 세아트의 독자 행보는 한참 뒤인 1980년대의 론다와 이비자 등의 등장부터입니다. 이 시기에는 피아트와의 계약이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진정한 독자 브랜드로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어서 독자 행보가 가능했습니다. 특히, 폭스바겐과 포르쉐로부터 기술협력과 이탈디자인 등으로부터 디자인을 도움받는 제휴 관계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잘 나가던 세아트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폭스바겐이 1982년에 협력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를 통해 세아트는 폭스바겐과 아우디 차량을 판매하거나 직접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이 지속되면서 1986년에는 세아트 주식의 절반 이상을 가져가게 되었고, 4년 후에는 99.99% 지분으로 완전하게 아우디와 한솥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자동차 기업으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자동차 회사 중 하나인 스코다(SKODA)도 폭스바겐그룹의 자회사입니다. 스코다는 체코산 브랜드로, 1895년에 유럽에서 자전거 회사로 설립되어 10년 후에 자동차를 제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스코다는 제1차 세계대전부터 군사무기를 만드는 등 다른 유럽 제조사들처럼 차근차근 발전해 나갔습니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화가 시작되면서 국영기업으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우수한 품질로 공산권 내 유명 메이커로 운영되었습니다. 냉전 종식 이후에는 체코 정부가 스코다 민영화를 추진했고, 폭스바겐은 이를 놓치지 않고 협력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폭스바겐은 결국 1994년에 스코다 주식의 60%를 수중에 넣으며 대주주가 되었고, 1995년에는 70% 이상을 차지했습니다. 폭스바겐 자회사가 된 스코다는 실용성 위주의 기본기에 집중한 차량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고, 오늘날 독일과 동유럽권을 중심으로 높은 인지도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황소표 슈퍼카로 유명한 람보르기니(Lamborghini) 역시 폭스바겐의 자회사 중 하나입니다. 람보르기니가 설립된 이후 1년 만에 페라리를 능가하는 350GT가 등장했고 이를 기점으로 미우라, 쿤타치, 디아블로, 가야르도, 우라칸 등 명차를 생산했습니다. 한창 잘 나가던 람보르기니는 경영난으로 잠시 크라이슬러에 매각되어 바이퍼 엔진 제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며, 1998년에는 폭스바겐에 인수되어 폭스바겐그룹의 슈퍼카 포지션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폭스바겐상용차(VWCV)는 독일의 상용차 브랜드이며, 폭스바겐 그룹의 계열사입니다. 한때는 폭스바겐 승용차 사업 지역의 일부였던 이곳은 1995년부터 폭스바겐의 별도 브랜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독일의 상용차 제조사인 만(Man)과 스웨덴의 상용차 회사인 스카니아(Scania)는 폭스바겐 트럭&버스(Volkswagen Truck & Bus AG)가 관리합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이 둘 회사도 폭스바겐그룹의 자회사이고, 폭스바겐상용차의 브랜드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스카니아는 월리스 지프와 폭스바겐 비틀 차종의 총판을 맡아 막대한 이윤을 챙겼고, 이를 바탕으로 내구성이 뛰어나고 성능 좋은 스카니아 표 디젤엔진을 개발하였습니다. 이후 2008년에 폭스바겐이 지분 18.7%와 의결권 34%를 확보하면서 경영권을 장악했습니다. 2011년 폭스바겐은 지분 획득을 통해 세계 최고의 트럭 제조사인 만(MAN) 인수에 성공했습니다.
폭스바겐이 인수한 벤틀리(Bentoey)는 1919년에 설립된 럭셔리 자동차 제조사이며, 창립자이자 엔지니어였던 월터 오웬 벤틀리(Walter Owen Bentoey)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고배기량 럭셔리 차량 수요가 있어 원활한 운영이 가능했지만, 경제 대공황이 불어닥치면서 2년 동안 100대도 채 안되는 처참한 판매량을 보일 정도로 경영악화에 시달렸습니다. 1931년에 결국,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상황인 벤틀리를 같은 영국회사인 롤스로이스가 인수하여 60여 년 동안 롤스로이스의 충실한 부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중에 영국의 중공업 전문 기업인 비커스(Vickers)가 롤스로이스를 인수하면서 비커스의 소유가 되었다가, 1998년에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비커스가 롤스로이스와 자회사 벤틀리를 내놓게 되었습니다. 이때, BMW와 폭스바겐이 럭셔리 브랜드를 인수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서로 두 기업을 인수하기 위해 수년간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경쟁 도중 폭스바겐이 롤스로이스 관련 지재권 일부를 사들이며 견제를 하는 등 다양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롤스로이스는 BMW가, 벤틀리는 폭스바겐이 인수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폭스바겐은 오토바이 회사도 자회사로 두고 있습니다. 폭스바겐의 자회사인 두카티(Ducati)는 바이크계의 페라리로 불립니다. 두카티는 1926년 두카티 형제에 의해 설립되어 무선기에 필요한 부품 등을 판매하는 전파상 정도의 작은 회사였습니다. 두카티가 뜬금없이 자전거에 엔진을 부착한 형태의 오토바이 쿠치올로(Cucciolo)를 제조하기 시작한 때는 2차 세계대전 당시입니다. 이들이 전혀 상관없는 업종으로 변경한 이유는 전후 이탈리아 국민들이 얇은 지갑 사정으로 인해 값싼 이동 수단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벌어들인 두카티는 기술개발을 위해 막대한 금액을 투자하기 시작했고, 1960년대부터 급격한 기술 성장을 바탕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폭스바겐그룹이 2012년에 아우디 자회사 이름으로 1조 원 이상을 지불하고 두카티를 인수했습니다. 이렇게 폭스바겐은 공격적인 인수를 통해서, 자동차계의 만물상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의 딸 루이제 피에히와 아들인 페리 포르쉐의 자녀들은 포르쉐 경영권을 지키기 위한 협력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주도권을 위한 갈등과 경쟁을 끊임없이 이어왔습니다. 2005년에는 벤델린 비데킹 회장이 이끌던 포르쉐가 거대한 폭스바겐그룹을 인수하겠다고 지분 인수에 나서며, 포르쉐가와 피에히가의 갈등이 표면화되었습니다. 당시 폭스바겐그룹은 피에히 가문의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회장으로 있었고, 비데킹 포르쉐 회장의 뒤에는 포르쉐 집안의 막내 볼프강 포르쉐(Wolfgang Porsche) 대주주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양가의 다툼은 결국 포르쉐의 승리로 귀결되는 듯하였으나, 2008년 금융위기로 자금조달이 어려워지자 역으로 2009년 폭스바겐이 포르쉐를 인수하며, 7년간의 오랜 다툼은 마침내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두 집안은 폭스바겐그룹 경영권을 함께 지키기로 하고 지주회사인 포르쉐SE를 통해 의결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양가가 함께 보유한 주식은 50% 이상으로서 폭스바겐그룹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후 페르디난트 피에히(Ferdinand Piëch)는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폭스바겐그룹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공격적 인수합병 등을 통해 회사를 거대한 제국으로 키웠으며, 카리스마를 앞세워 자신이 주도하는 방향으로 회사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이렇게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의 외손주 회사 폭스바겐이 손자 회사 포르쉐를 인수함으로써, 두 회사는 다시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습니다.
중국 시장은 폭스바겐 전체 매출액의 4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중국 자동차 시장은 성장세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그 규모를 성장시키고 있습니다. 폭스바겐이 이런 중국의 자동차 시장을 선점할 수 있었던 계기는 중국 정부의 개방을 통해 산업화 의지와 기술 이전을 통해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고자 하는 폭스바겐의 이해가 맞아 들면서였습니다. 대외적으로 중국은 외국 자본 및 기술에 대한 개방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이 개발 과정에서 중국 정부는 타 산업과 연관 효과가 높은 자동차 산업을 육성하기로 하고, 낙후된 중국의 자동차생산기술과 설비투자를 위한 자금과 기술을 도입하고자 외국기업의 직접투자를 장려했습니다. 단, 외국의 직접투자는 100% 지분 투자를 금지하고 중국 기업과의 50% 이내의 합작 투자만을 허용하는 정책을 세웠습니다. 외국 직접투자를 선정하면서 중국 정부는 다종차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기술 이전과 부품의 현지 조달이라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이러한 중국 정부의 조건에 처음에 대부분의 글로벌 자동차 업체는 중국 소득 수준이 너무 낮아 수요가 없으며, 기술 이전을 해가며 투자할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폭스바겐은 기술 이전에 따른 위험보다 시장을 선점하는 이득을 더 크게 보았고, 세 가지 요구조건을 걸어 중국 시장에 진출하였습니다. 세 가지 조건은 중국 정부와 국영기업에서 사용하는 관용차를 폭스바겐으로 선정해야 하고, 다른 외국 자동차 업체의 중국 내 투자를 제한해야 하며, 자동차 부품에 붙이는 관세를 낮춰서 완성차를 수입할 때 관세를 올려달라는 요구조건이었습니다. 그렇게 폭스바겐은 1985년에 상하이자동차와 제휴하여 합자회사인 상하이따쫑(上海大衆)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중국 자동차 시장에 진출했습니다. 또한 1991년에는 중국의 이치자동차(一汽)와 폭스바겐의 합자회사인 이치따쫑(一汽大衆)을 설립했습니다. 2016년에는 폭스바겐이 중국 장화이자동차(江淮汽车)와 제휴하면서 중국 전기자동차 분야에도 진출했습니다.
전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전기자동차 분야가 부상하면서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테슬라(Tesla)가 전기자동차 전용 플랫폼으로 성공을 거두어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폭스바겐이 전기자동차 대중화 시대를 위한 전략으로 일렉트릭 포 올(Electric for all)을 발표하면서, 전기자동차 전용 MEB 플랫폼을 공개했습니다. 폭스바겐의 전기자동차 플랫폼 전략은 ‘개방’입니다. 단순히 폭스바겐그룹 내에서만 MEB 플랫폼을 활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폭스바겐은 MEB 플랫폼의 효용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다면 외부와 공유하는 것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이미 MEB 플랫폼을 공개할 당시 외부에 공급하는 방안을 수립한 것이 폭스바겐이었습니다. 폭스바겐은 2015년 대학 벤처기업으로 시작하여 소형 전기자동차와 전기버스를 개발하고 있는 독일의 이고모바일에 MEB 플랫폼을 공급하기로 했으며, 양산에 최적화된 폭스바겐보다 다품종을 생산할 수 있는 스타트업에 MEB 플랫폼을 판매하여 또 다른 수익 창구를 만들어냈습니다. 폭스바겐의 플랫폼 공유 전략은 자동차 시장의 외연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폭스바겐은 소비자에게 완성차를 판매하는 데서 더 나아가 전기자동차 플랫폼까지 판매하여 플랫폼 시장 시대를 개척해 나가고 있습니다.
폭스바겐은 전기자동차에 초점을 맞추면서 2026년에는 휘발유와 디젤 등 내연기관 자동차 생산을 전면 중단하기로 선언했으며, 독일 공장 중 3곳을 전기자동차로 전환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전 세계 자동차 판매량 1, 2위 업체인 폭스바겐과 토요타가 내연차 생산 중단을 선언했고, 판매량 세계 3위를 기록하고 있는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 역시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함께 전기자동차 생산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내연차 생산중단 선언은 사실상 ‘내연차 퇴출 및 전기자동차 생산 올인’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 펼쳐질 전기자동차 시장에서 폭스바겐의 행보가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