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이야기
이지아, 2020년 12월 28일
메르세데스-벤츠(Mercedes-Benz)는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럭셔리 카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구축한 브랜드입니다. 벤츠는 부와 명예의 상징처럼 여겨지곤 하는데요. 특히 세계 각국 정상급 인사들이 의전 차량으로 벤츠를 선택하며 럭셔리 세단 시장에서 강세를 보이며 높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벤츠의 시작은 매우 초라했습니다. 벤츠의 창업주 중 한 명인 카를 벤츠(Karl Benz)는 지금으로부터 135여 년 전 자신이 만든 자동차를 사람들에게 선보였습니다. 그가 개발한 최초의 자동차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싸늘했습니다. 심지어 그를 반쯤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으며 최초의 자동차를 두고는 냄새나는 고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카를 벤츠의 자동차 발명 스토리를 알아보겠습니다.
카를 벤츠는 1844년 11월 25일 독일 카를스루(Karlsruhe)에서 철도 기관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Karl Benz라고도 쓰지만 Carl Benz라고 쓰기도 합니다. 그가 두 살이 되던 해 폐렴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살림이 어려워지기 시작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하숙업으로 가계를 꾸리며 카를이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카를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사진과 시계 등 기술 분야에 흥미와 소질을 보였습니다. 13세 때 처음 본 내연기관은 그의 인생을 바꿨고 그때부터 카를은 ‘움직이는 차’를 만들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꿈을 가지고 고향에 소재한 전문대학에 진학하여 대학을 마친 뒤, 같은 지역의 기계 산업 회사에서 2년간의 실무 교육을 이수했습니다. 이후 만하임 계량기 공장의 제도공이자 설계자로 일하며 엔지니어로서의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그러나 카를은 그의 경력을 순탄하게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1868년 직장을 잃고 교량 건축 전문회사에 입사했으나 그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했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위치한 제철 회사에 들어가지만 그마저도 짧게 근무하여 떠돌이 신세가 되었습니다.
카를은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자동차를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1871년 엔지니어였던 아우구스트 리터(August Ritter)와 힘을 합쳐 독일 만하임에 첫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업계의 신생아였습니다. 회사 설립 이후 그렇다 할 수익을 내지 못했고, 창업 시 받은 대출금을 해결하지 못해 차압까지 들어오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직접 영입했던 기계 기술자인 아우구스트 리터와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믿을 수 없는 사업 파트너라는 것을 알게 된 카를은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이런 카를을 그의 약혼녀인 베르타 링거(Bertha Ringer)는 곁에서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낙천적이고 진취적이며 모험심이 강한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될 성실하고 전도유망한 남자가 사업 파트너로 인해, 또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자신의 결혼 지참금을 미리 카를에게 주었습니다. 비록 거액은 아니었지만 카를은 그 돈으로 사업 파트너에게서 권리를 사들이고, 의사결정권을 확보하여 아우구스트 리터를 해고했습니다. 그녀의 지참금이 카를이 스스로 회사를 경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준 셈이지요. 1872년 카를 벤츠는 자신의 신생 회사가 다시 시작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베르타 벤츠(Bertha Benz)와 결혼을 했습니다. 금슬이 좋았던 그들은 슬하에 5명의 자녀를 둔 다자녀 가구의 부부가 되었습니다.
초창기 카를의 사업은 성장이 매우 더뎠습니다. 주철공장과 기계작업실은 회사의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아 공구들이 압류되기까지 했습니다. 카를은 회사의 새로운 수입원을 찾기 위해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목표로 했던 ‘말이 끌지 않는 자동차’를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이 끌지 않는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엔진이 필요했습니다. 1877년 도이츠 가스 자동차 공장(Deutz Gasmotorenfabrik)이 4행정기관에 대한 특허를 출원했기 때문에 카를은 가스 구동 방식의 2행정기관 엔진 개발에 집중적으로 매진했고, 2년간의 개발 끝에 1879년 엔진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2행정기관을 개발하면서 카를은 엔진 속도 조절과 같은 자동차 개발에 필요한 여러 주요 기술 특허를 획득하였습니다. 이때 자동차의 시동을 걸기 위한 배터리 점화 장치를 개발하기도 하였죠. 1882년 카를 벤츠와 베르타 벤츠는 새로운 재정 지원자와 파트너, 은행의 도움으로 회사를 공개유한책임회사로 변경하고 회사명도 만하임 가스 엔진 제작회사(Gasmotoren-Fabrik Mannheim)로 개명했습니다. 당시 카를의 지분은 5%에 불과했는데, 그가 기술 부분에 미치는 영향력은 제한적이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후원자이자 사업 파트너들은 안정적인 비즈니스인 고정형 가스 엔진 개발에만 매진할 것을 원했습니다. 결정적으로 경영에 함께한 파트너들이 카를의 설계에 조금씩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결국 1883년 카를은 회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카를 벤츠는 자신이 만든 자동차로 특허를 땄고, 공인된 자동차 역사에서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가진 주인공이 되었지만, 페이턴트 모터바겐에 대한 이웃들의 평가는 냉혹했습니다. 환영은커녕 말이 이끄는 마차가 아닌 괴상한 소리를 내며 달리는 세 바퀴 물건에 대해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냄새난 고물이라며 이웃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배척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자신이 오랜 시간을 투입하여 만들어낸 열정의 산물이 세상에서 냉정한 평가와 외면을 받는 것에 카를은 의기소침했습니다. 완벽주의와 소심한 성격 탓에 내연기관 자동차를 발명하고도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고민만 하던 카를에게 용기를 준 것은 바로 그의 아내 베르타 벤츠였습니다. 자칫했으면 역사의 뒤편에 가려졌을지도 모를 페이턴트 모터바겐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도 바로 그의 아내의 도전정신 덕분이었습니다.
카를 벤츠의 자동차로 장거리 주행을 성공한 그녀의 스토리는 전국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회사가 커지고, 생산 시설도 대규모로 갖추게 되었습니다. 회사 운영은 순탄했지만 카를 벤츠는 재정적인 지원을 해준 파트너와 지향점에 대한 이견으로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이에 카를 벤츠는 다시 한 번 새로운 투자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1890년 5월 율리우스 간스(Julius Gans)와 프레드리히 피셔(Friedrich von Fischer)를 새로운 투자자로 맞이했습니다. 새로운 파트너가 합류하며 1890년 카를의 라이니쉐 가스 자동차 공장은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엔진 제조 공장으로 성장했습니다. 1893년 카를 벤츠는 액슬 피벗 스티어링을 자동차에 도입하여, 앞바퀴를 다각도로 움직일 수 있는 콘트라(contra) 엔진을 개발했습니다.
이에 힘입어 카를은 세계 최초의 양산차인 빅토리아(Victoria)를 출시했습니다. 다음해인 1894년에는 서스펜션과 헤드램프를 탑재한 자동차인 벨로(Velo)를 개발했습니다. 벨로는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끌어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는데, 1894년부터 1901년 사이에 약 1,200대가 생산됐습니다. 이 판매량은 벨로를 최초의 양산 차량으로 간주하는 자동차 역사학자들이 있기도 할 만큼, 믿을 수 없이 큰 수치였습니다. 자동차 개발에 대한 카를의 뜨거운 열망은 계속됐습니다. 1896년 카를은 평면엔진에 대한 특허를 취득했습니다. 복서엔진이라고도 불리는 이 엔진은 4개의 실린더가 수평으로 마주보고 서 있는 형태입니다. 이 방식은 요즘의 차들에도 적용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포르쉐의 박스터가 있습니다. 카를의 벤츠 자동차 회사는 19세기 말 독일 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선도적인 자동차 회사로 성장하였습니다.
1899년에는 회사를 공개유한책임회사로 전환하여 벤츠앤씨에(Benz & Cie)로 이어졌습니다. 1890년부터 10년 동안 벤츠앤씨에의 직원은 50명에서 430명으로 늘어났고, 1899년에는 연간 생산량이 572대에 이르렀습니다. 1903년 1월 24일, 카를 벤츠는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감독이사회의 이사가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가 이사직으로 내려왔을 당시 프랑스는 마이바흐(Maybach) 제품들을 가지고 자동차 산업을 키워나가고 있었습니다. 빌헬름 마이바흐(Wilhelm Maybach)는 당시 다임러(Daimler)의 개발이사였는데, 새로 취임한 경영진이 경쟁사였던 메르세데스(Mercedes)와 경쟁을 목표로 만하임 공장에 프랑스 출신의 설계자들을 고용한다는 소식을 듣고 결국 회사를 떠났습니다. 카를 벤츠의 아들 오이겐 벤츠(Eugen Benz)와 리하르트 벤츠(Richard Benz)도 함께 회사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1904년에 승용차 생산 관리자로 다시 복귀했고 그해 연말까지 벤츠 자동차의 판매량은 3,480대에 달했습니다. 비록 카를 벤츠는 회사를 떠났지만 회사는 큰 성공을 이뤘습니다.
1906년 카를 벤츠는 그의 아들 오이겐과 함께 카를 벤츠 죄네(Karl Benz Söhne) 사를 공동으로 설립했습니다. 그들은 자연 흡기 방식의 가스 엔진을 개발하고자 했으나 실패한 후, 차량 구조에 관심을 돌렸습니다. 1925년까지 카를 벤츠 죄네사는 350대의 자동차를 생산하였습니다. 1912년 카를 벤츠는 그의 아들 오이겐과 리하르트가 회사를 경영하도록 하고 회사를 떠났습니다. 회사는 이후에도 점점 성장하였고 시장도 넓혀나가 1925년까지 350대의 자동차를 생산했습니다. 특히, 영국에서는 택시회사들이 카를 벤츠 죄네 자동차를 선택했으며, 여기서 얻은 신뢰 때문에 회사에 대한 인기가 급상승했습니다. 마지막 자동차는 1923년에 생산되었습니다. 비록 1년 뒤에 8/25hp 자동차를 조립하기는 했으나 이 차량은 카를 벤츠가 자신의 사업과 개인 용도로 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