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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솔린 자동차를 발명한 카를 벤츠

이지아, 2020년 12월 28일

메르세데스-벤츠(Mercedes-Benz)는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럭셔리 카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구축한 브랜드입니다. 벤츠는 부와 명예의 상징처럼 여겨지곤 하는데요. 특히 세계 각국 정상급 인사들이 의전 차량으로 벤츠를 선택하며 럭셔리 세단 시장에서 강세를 보이며 높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벤츠의 시작은 매우 초라했습니다. 벤츠의 창업주 중 한 명인 카를 벤츠(Karl Benz)는 지금으로부터 135여 년 전 자신이 만든 자동차를 사람들에게 선보였습니다. 그가 개발한 최초의 자동차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싸늘했습니다. 심지어 그를 반쯤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으며 최초의 자동차를 두고는 냄새나는 고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카를 벤츠의 자동차 발명 스토리를 알아보겠습니다.

카를 벤츠(Karl Benz)카를 벤츠(Karl Benz)
1844년 11월 25일 독일 카를스루에서 출생
1871년 독일 만하임에서 첫 회사 설립
1872년 베르타 벤츠(Bertha Benz)와 결혼
1879년 2행정기관 엔진 개발
1883년 10월 벤츠자동차 회사(Benz & Co) 설립
1883년 10월 라이니쉐 가스 자동차 공장(Rheinische Gasmotoren-Fabrik) 설립
1885년 4행정 가솔린 엔진을 탑재한 삼륜 자동차 개발
1886년 세계 최초의 가솔린 자동차인 페이턴트 모터바겐(Patent-Motorwagen) 특허 획득
1888년 8월 아내인 베르타 벤츠가 가솔린 자동차 장거리 주행에 성공
1894년 최초의 양산형 자동차인 벨로(Velo) 개발
1896년 평면엔진에 대한 특허 획득
1899년 벤츠앤씨에(Benz & Cie) 회사 주식 공개
1906년 아들인 오이겐 벤츠와 함께 카를 벤츠 죄네(Karl Benz Söhne) 회사를 설립
1912년 은퇴
1926년 벤츠앤씨에와 DMG의 합병으로 다임러-벤츠 AG 회사 설립
1929년 4월 4일 별세

사업 초기의 어려움

카를 벤츠는 1844년 11월 25일 독일 카를스루(Karlsruhe)에서 철도 기관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Karl Benz라고도 쓰지만 Carl Benz라고 쓰기도 합니다. 그가 두 살이 되던 해 폐렴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살림이 어려워지기 시작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하숙업으로 가계를 꾸리며 카를이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카를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사진과 시계 등 기술 분야에 흥미와 소질을 보였습니다. 13세 때 처음 본 내연기관은 그의 인생을 바꿨고 그때부터 카를은 ‘움직이는 차’를 만들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꿈을 가지고 고향에 소재한 전문대학에 진학하여 대학을 마친 뒤, 같은 지역의 기계 산업 회사에서 2년간의 실무 교육을 이수했습니다. 이후 만하임 계량기 공장의 제도공이자 설계자로 일하며 엔지니어로서의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그러나 카를은 그의 경력을 순탄하게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1868년 직장을 잃고 교량 건축 전문회사에 입사했으나 그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했고,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위치한 제철 회사에 들어가지만 그마저도 짧게 근무하여 떠돌이 신세가 되었습니다.

카를은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자동차를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1871년 엔지니어였던 아우구스트 리터(August Ritter)와 힘을 합쳐 독일 만하임에 첫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업계의 신생아였습니다. 회사 설립 이후 그렇다 할 수익을 내지 못했고, 창업 시 받은 대출금을 해결하지 못해 차압까지 들어오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직접 영입했던 기계 기술자인 아우구스트 리터와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믿을 수 없는 사업 파트너라는 것을 알게 된 카를은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학생 시절의 카를 벤츠(Karl Benz)학생 시절의 카를 벤츠(Karl Benz) 18세의 베르타 벤츠(Bertha Benz)18세의 베르타 벤츠(Bertha Benz)

이런 카를을 그의 약혼녀인 베르타 링거(Bertha Ringer)는 곁에서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낙천적이고 진취적이며 모험심이 강한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될 성실하고 전도유망한 남자가 사업 파트너로 인해, 또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자신의 결혼 지참금을 미리 카를에게 주었습니다. 비록 거액은 아니었지만 카를은 그 돈으로 사업 파트너에게서 권리를 사들이고, 의사결정권을 확보하여 아우구스트 리터를 해고했습니다. 그녀의 지참금이 카를이 스스로 회사를 경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준 셈이지요. 1872년 카를 벤츠는 자신의 신생 회사가 다시 시작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베르타 벤츠(Bertha Benz)와 결혼을 했습니다. 금슬이 좋았던 그들은 슬하에 5명의 자녀를 둔 다자녀 가구의 부부가 되었습니다.

초창기 카를의 사업은 성장이 매우 더뎠습니다. 주철공장과 기계작업실은 회사의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아 공구들이 압류되기까지 했습니다. 카를은 회사의 새로운 수입원을 찾기 위해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목표로 했던 ‘말이 끌지 않는 자동차’를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이 끌지 않는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엔진이 필요했습니다. 1877년 도이츠 가스 자동차 공장(Deutz Gasmotorenfabrik)이 4행정기관에 대한 특허를 출원했기 때문에 카를은 가스 구동 방식의 2행정기관 엔진 개발에 집중적으로 매진했고, 2년간의 개발 끝에 1879년 엔진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2행정기관을 개발하면서 카를은 엔진 속도 조절과 같은 자동차 개발에 필요한 여러 주요 기술 특허를 획득하였습니다. 이때 자동차의 시동을 걸기 위한 배터리 점화 장치를 개발하기도 하였죠. 1882년 카를 벤츠와 베르타 벤츠는 새로운 재정 지원자와 파트너, 은행의 도움으로 회사를 공개유한책임회사로 변경하고 회사명도 만하임 가스 엔진 제작회사(Gasmotoren-Fabrik Mannheim)로 개명했습니다. 당시 카를의 지분은 5%에 불과했는데, 그가 기술 부분에 미치는 영향력은 제한적이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후원자이자 사업 파트너들은 안정적인 비즈니스인 고정형 가스 엔진 개발에만 매진할 것을 원했습니다. 결정적으로 경영에 함께한 파트너들이 카를의 설계에 조금씩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결국 1883년 카를은 회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세계 최초의 가솔린 자동차 개발

(1) 세계 최초의 가솔린 자동차, 페이턴트 모터바겐

19세기 후반 독일 만하임에 위치한 벤츠 자동차 공장19세기 후반 독일 만하임에 위치한 벤츠 자동차 공장같은 해인 1883년 카를 벤츠는 사업가인 막스 로제(Max Rose)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에슬링거(Friedrich Wilhelm Esslinger)로부터 금전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그해 10월 카를은 만하임에 벤츠 자동차 회사(Benz & Co)와 세계 최초의 자동차 공장 라이니쉐 가스 자동차 공장(Rheinische Gasmotoren-Fabrik)을 설립할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카를이 자동차 엔진 개발에 모든 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고, 새 회사는 급격하게 성장했습니다. 둘뿐이었던 직원 수는 금세 25명이 되었고, 가스 엔진을 제조하기 위한 면허도 발급받았습니다.

재정적으로 안정이 되자 카를 벤츠는 4행정 가솔린 엔진을 장착한 고성능 자동차를 설계하기 시작하여, 1885년 2인승 마차에 0.75마력 1기통 4행정 엔진을 달고 차동 장치까지 탑재한 차를 완성했습니다. 이 차가 바로 첫 번째 삼륜 자동차입니다. 이듬해인 1886년 카를은 ‘특허 받은 자동차’라는 의미를 지닌 페이턴트 모터바겐(Patent-Motorwagen)이라는 이름을 붙여 해당 차량을 공개했습니다. 페이턴트 모터바겐은 세계 최초로 ‘자동차’라는 이름으로 독일에서 특허를 받았습니다. 1885년부터 1887년까지 세 종류의 삼륜차를 생산했는데, 첫 번째 모델은 1906년 독일 박물관에 기증했고, 두 번째 모델은 여러 번 수정 개조했으며, 목재 스포크 차륜을 장착한 3번 모델은 그의 아내가 1888년 최초로 장거리 자동차 주행을 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페이턴트 모터바겐(Patent-Motorwagen)페이턴트 모터바겐(Patent-Motorwagen) 페이턴트 모터바겐에 탑승해 있는 카를 벤츠페이턴트 모터바겐에 탑승해 있는 카를 벤츠

카를 벤츠는 자신이 만든 자동차로 특허를 땄고, 공인된 자동차 역사에서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가진 주인공이 되었지만, 페이턴트 모터바겐에 대한 이웃들의 평가는 냉혹했습니다. 환영은커녕 말이 이끄는 마차가 아닌 괴상한 소리를 내며 달리는 세 바퀴 물건에 대해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냄새난 고물이라며 이웃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배척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자신이 오랜 시간을 투입하여 만들어낸 열정의 산물이 세상에서 냉정한 평가와 외면을 받는 것에 카를은 의기소침했습니다. 완벽주의와 소심한 성격 탓에 내연기관 자동차를 발명하고도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고민만 하던 카를에게 용기를 준 것은 바로 그의 아내 베르타 벤츠였습니다. 자칫했으면 역사의 뒤편에 가려졌을지도 모를 페이턴트 모터바겐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도 바로 그의 아내의 도전정신 덕분이었습니다.

(2) 세계 최초의 여성 운전자, 베르타 벤츠

주행 테스트를 하는 베르타 벤츠(Bertha Benz)주행 테스트를 하는 베르타 벤츠(Bertha Benz)1888년 8월의 어느 날 이른 새벽, 베르타는 그녀의 남편이 깊게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두 아들과 함께 친정에 다녀온다는 짧은 메모 한 장을 남겨둔 채 집을 빠져나왔습니다. 창고에 간 그녀는 남편이 소중히 보관해 둔 ‘말 없이 움직이는 차’를 끌어냈습니다. 집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생겼을 때 그녀와 두 아들은 자동차의 시끄러운 엔진을 켜고 절대 순탄치 않은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오랜 시간 공들여 개발했지만 실용화하지 못하고 남 몰래 보관만 하고 있던 남편을 대신해, 베르타는 남편이 발명한 우수한 작품, 가솔린 자동차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남편 카를 벤츠의 차가 마차를 대체하는 새로운 운송수단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최초의 자동차 장거리 여행이자 주행 테스트를 감행했습니다.
장거리 주행 여정장거리 주행 여정그녀가 감행한 여정은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던 만하임(Mannheim)에서 친정이 있던 포르츠하임(Pforzheim)까지로, 무려 106km에 해당하는 먼 거리였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여정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당시 도로는 지금과 같이 포장이 된 도로가 아닌 비포장 흙길이었습니다. 딱딱한 나무에 고무를 덧입혀 만든 바퀴는 울퉁불퉁한 길의 충격을 흡수하지 못해 승차감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고, 장시간 운전을 하면 피로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는 상태였습니다. 상용화된 자동차의 핸들은 둥글지만 당시의 핸들은 막대 모양인 데다가 레버식 브레이크가 탑재되어 있어 운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여름의 더운 날씨까지 그녀의 주행을 결코 돕지 않았습니다. 자동차 냉각수가 말라 엔진이 과열되어 연기가 나는 바람에 계속해서 시냇물을 퍼다 부어 냉각수로 써야 했고, 연료가 바닥나면 근처 약국에서 솔벤트를 사 기름통을 채웠습니다. 당시엔 가솔린이 약국에서 소독용으로 팔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이 약국이 최초의 주유소였던 것이지요. 연료 파이프에 이물질이 가득해 노즐이 막힌 것을 발견하고 머리핀으로 이물질을 빼낸 후 다시 출발하기도 했습니다. 체인과 브레이크용 가죽이 끊어질 때는 스타킹까지 이용하여 응급처치를 했고, 친정에 거의 다다랐을 때에는 브레이크가 말썽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르타는 그녀의 여행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근처 신발가게에 들러 새 신발을 샀습니다. 신발을 산 목적은 장거리 운전을 하느라 까지고 더러워진 자신의 신발을 새로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닳아 고장이 난 브레이크의 가죽을 대체하는 것이었습니다.

해가 떨어질 무렵 무사히 그녀와 두 아이들은 대장정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남편의 자동차를 타고 먼지와 땀범벅이 된 채, 드디어 친정에 도착한 두 아들과 베르타의 얼굴에는 피곤이 아닌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이 타고 온 처음 보는 요상한 기구가 마을사람들의 큰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했습니다. 말이 끌지 않고 스스로 달리는 차가 106㎞나 되는 거리를 달려왔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깜짝 놀랐습니다. 친정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 카를 벤츠는 그 누구보다도 감격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연약한 여자와 아이들도 장거리 운전을 할 수 있는 자동차라면 분명히 승산이 있을 것이다!”
베르타 벤츠(Bertha Benz)베르타 벤츠(Bertha Benz)그의 아내가 직접 운전하며 얻은 경험담은 훗날 그가 자동차가 가지고 있던 문제들을 보완하여 더 편리하고 튼튼한 자동차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나중에야 그녀는 기름이 바닥났을 땐 몇 시간이고 두 아들과 함께 자동차를 밀고 가기도 했다며 고비의 순간을 고백했습니다. 어쨌든 카를 벤츠에게 아내의 여정은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 주었고, 비판적인 비평가와 무심한 언론의 마음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베르타 벤츠는 장거리 자동차 주행을 한 첫 번째 사람이자, 역사상 최초의 여성 자동차 운전자가 되었습니다.


벤츠 회사의 성장과 합병

카를 벤츠의 자동차로 장거리 주행을 성공한 그녀의 스토리는 전국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회사가 커지고, 생산 시설도 대규모로 갖추게 되었습니다. 회사 운영은 순탄했지만 카를 벤츠는 재정적인 지원을 해준 파트너와 지향점에 대한 이견으로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이에 카를 벤츠는 다시 한 번 새로운 투자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1890년 5월 율리우스 간스(Julius Gans)와 프레드리히 피셔(Friedrich von Fischer)를 새로운 투자자로 맞이했습니다. 새로운 파트너가 합류하며 1890년 카를의 라이니쉐 가스 자동차 공장은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엔진 제조 공장으로 성장했습니다. 1893년 카를 벤츠는 액슬 피벗 스티어링을 자동차에 도입하여, 앞바퀴를 다각도로 움직일 수 있는 콘트라(contra) 엔진을 개발했습니다.

빅토리아(Victoria)에 탑승해 있는 카를 벤츠와 베르타 벤츠빅토리아(Victoria)에 탑승해 있는
카를 벤츠와 베르타 벤츠
벨로(Velo)벨로(Velo)

이에 힘입어 카를은 세계 최초의 양산차인 빅토리아(Victoria)를 출시했습니다. 다음해인 1894년에는 서스펜션과 헤드램프를 탑재한 자동차인 벨로(Velo)를 개발했습니다. 벨로는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끌어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는데, 1894년부터 1901년 사이에 약 1,200대가 생산됐습니다. 이 판매량은 벨로를 최초의 양산 차량으로 간주하는 자동차 역사학자들이 있기도 할 만큼, 믿을 수 없이 큰 수치였습니다. 자동차 개발에 대한 카를의 뜨거운 열망은 계속됐습니다. 1896년 카를은 평면엔진에 대한 특허를 취득했습니다. 복서엔진이라고도 불리는 이 엔진은 4개의 실린더가 수평으로 마주보고 서 있는 형태입니다. 이 방식은 요즘의 차들에도 적용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포르쉐의 박스터가 있습니다. 카를의 벤츠 자동차 회사는 19세기 말 독일 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선도적인 자동차 회사로 성장하였습니다.

벤츠앤씨에(Benz & Cie)벤츠앤씨에(Benz & Cie) 벤츠앤씨에의 지면광고벤츠앤씨에의 지면광고

1899년에는 회사를 공개유한책임회사로 전환하여 벤츠앤씨에(Benz & Cie)로 이어졌습니다. 1890년부터 10년 동안 벤츠앤씨에의 직원은 50명에서 430명으로 늘어났고, 1899년에는 연간 생산량이 572대에 이르렀습니다. 1903년 1월 24일, 카를 벤츠는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감독이사회의 이사가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가 이사직으로 내려왔을 당시 프랑스는 마이바흐(Maybach) 제품들을 가지고 자동차 산업을 키워나가고 있었습니다. 빌헬름 마이바흐(Wilhelm Maybach)는 당시 다임러(Daimler)의 개발이사였는데, 새로 취임한 경영진이 경쟁사였던 메르세데스(Mercedes)와 경쟁을 목표로 만하임 공장에 프랑스 출신의 설계자들을 고용한다는 소식을 듣고 결국 회사를 떠났습니다. 카를 벤츠의 아들 오이겐 벤츠(Eugen Benz)와 리하르트 벤츠(Richard Benz)도 함께 회사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1904년에 승용차 생산 관리자로 다시 복귀했고 그해 연말까지 벤츠 자동차의 판매량은 3,480대에 달했습니다. 비록 카를 벤츠는 회사를 떠났지만 회사는 큰 성공을 이뤘습니다.

1906년 카를 벤츠는 그의 아들 오이겐과 함께 카를 벤츠 죄네(Karl Benz Söhne) 사를 공동으로 설립했습니다. 그들은 자연 흡기 방식의 가스 엔진을 개발하고자 했으나 실패한 후, 차량 구조에 관심을 돌렸습니다. 1925년까지 카를 벤츠 죄네사는 350대의 자동차를 생산하였습니다. 1912년 카를 벤츠는 그의 아들 오이겐과 리하르트가 회사를 경영하도록 하고 회사를 떠났습니다. 회사는 이후에도 점점 성장하였고 시장도 넓혀나가 1925년까지 350대의 자동차를 생산했습니다. 특히, 영국에서는 택시회사들이 카를 벤츠 죄네 자동차를 선택했으며, 여기서 얻은 신뢰 때문에 회사에 대한 인기가 급상승했습니다. 마지막 자동차는 1923년에 생산되었습니다. 비록 1년 뒤에 8/25hp 자동차를 조립하기는 했으나 이 차량은 카를 벤츠가 자신의 사업과 개인 용도로 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메르세데스-벤츠(Mercedes-Benz) 로고메르세데스-벤츠(Mercedes-Benz) 로고 다임러(Daimler) 로고다임러(Daimler) 로고
1924년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후 자동차 산업도 경기 침체를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당시 많은 기업들이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합병이나 동업의 형태로 변화하는 추세였습니다. 벤츠앤씨에 회사 또한 수년 동안 경쟁관계였던 다임러 모토렌 게젤샤프트(DMG; Daimler Motoren-Gesellschaft)와 연합을 단행하기로 합의하고 기술, 영업, 마케팅 등의 분야에서 협조를 통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양사의 공동 마케팅 활동은 새롭게 설립된 메르세데스-벤츠(Mercedes-Benz Automobil GmbH) 회사가 담당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두 회사는 위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결국 1926년 벤츠앤씨에와 DMG의 합병이 이루어져 현재 다임러 AG의 모태인 다임러-벤츠 AG가 설립되었습니다. 이후 독일에 자동차 붐이 일며 열망을 이루게 된 카를 벤츠는 다임러-벤츠 AG에서 중추 역할을 하다가 합병 3년 후인 1929년 4월 4일 84세의 나이로 독일 라덴부르크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카를 벤츠는 세계 최초의 가솔린 자동차 발명가이자, 오늘날 최고급 럭셔리 자동차의 대명사인 벤츠를 만드는 메르세데스-벤츠 회사의 공동창업자입니다. 비록 그는 떠났지만, 그가 자동차 산업의 역사에 남긴 업적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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