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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GM의 전신, 대우자동차

이지아, 2020년 12월 01일

대우자동차 로고대우자동차 로고오늘날 한국지엠의 전신인 대우자동차(Daewoo)는 과거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와 대한민국의 3대 자동차 회사로 꼽혔습니다. 특히 IMF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에는 현대와 기아를 누르고 대우자동차가 한국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초기 ‘신진자동차공업’에서 시작한 대우자동차의 역사에는 흥망성쇠가 많았습니다.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마다 사명을 바꾸곤 했지만, 1980년 대우그룹 산하의 ‘대우자동차’로 재도약하며 비로소 안정적인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의 역사 또한 녹록치만은 않았습니다. 1999년 대우그룹이 몰락하면서 대부분의 지분이 미국 제너럴모터스(GM)로 넘어가 현재의 한국지엠이 되었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우자동차의 흥망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우자동차의 시초, 신진자동차

신진자동차의 ‘코로나’ 지면 광고신진자동차의 ‘코로나’ 지면 광고대우자동차의 시초는 1965년 설립된 신진자동차공업입니다. 당시 신진자동차공업은 부산에서 미군이 남겨놓은 군용트럭 섀시를 재생해서 버스를 제작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1963년 일본 닛산 자동차의 부품을 수입해 조립·생산하던 새나라자동차의 자동차 조립생산 라인을 사들여 본격적으로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이후 신진자동차공업은 신진자동차로 이름을 변경하고 일본 토요타와 제휴를 맺고 당대 최고의 자동차인 코로나(1966), 크라운(1967), 퍼블리카(1967) 등을 생산하며 한 때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이중 코로나는 1960년대 한국 도로 사정에 가장 적합한 자동차로 국내 승용차 시장의 최강자로 군림하기도 했습니다. 신진자동차가 점령한 것은 비단 승용차 시장만이 아니었습니다. 코로나를 통해 부를 축적한 신진자동차는 정부의 혜택과 더불어 사세를 확장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 최초의 디젤 버스를 생산했으며, 국내 최초로 민용 지프를 출시하는 등 ‘대한민국 자동차 = 신진자동차’라는 공식이 성립할 정도였습니다.

대우자동차가 되기까지

새한자동차 시절의 ‘레코드 로얄’, ‘제미니’ 신문광고 이미지새한자동차 시절의 ‘레코드 로얄’,
‘제미니’ 신문광고 이미지
그러나 무리한 사세확장과 외환시장의 불안 등이 겹치면서 경영난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1972년 설상가상으로 일본 정부가 중국과 통상을 위해 저우 4원칙을 받아들이면서 토요타가 한국에서 철수했고, 신진자동차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저우 4원칙은 중국의 총리 저우언라이(周恩来)가새한자동차 시절의 ‘레코드 로얄’, ‘제미니’ 신문광고 이미지 일본과의 회담에서 밝힌 내용으로, “한국 및 대만과 거래하는 기업, 한국 및 대만의 기업에 투자하고 있는 기업, 베트남 전쟁에 물자 및 무기를 지원 및 판매하는 기업, 미국기업의 일본법인 및 일본 소재의 자회사”와는 거래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대우그룹 김우중(金宇中) 회장대우그룹 김우중(金宇中) 회장이때 신진자동차는 극적으로 미국의 GM과 180억원을 공동출자하여 GM코리아를 설립하였습니다. GM코리아는 GM 기반의 자동차인 시보레 1700, 카미나, 제미니, 레코드 로얄 등을 국내에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GM 계열 차량들은 국내 도로 사정과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도로에서는 전혀 맞지 않는 크고 무거운 자동차는 인기가 있을 리 없었죠. 이러한 이유로 GM코리아의 사세는 점점 더 기울기 시작하여 계열사들이 통폐합되거나 다른 기업이 인수하는 등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976년 GM코리아마저도 경영 부진에 빠지면서 산업은행에 채권이 넘어가게 되고, 회사명을 새한자동차로 다시 바꾸게 되었습니다.

1978년 대우그룹이 산업은행에서 가지고 있던 GM코리아의 지분을 모두 인수하게 되고 그렇게 우리에게 익숙한 대우자동차가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대우그룹은 새한자동차를 인수하고 나서도 한참 동안 대우자동차라는 이름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는 GM과의 경영권 분쟁 때문이었는데, 최종적으로 산업은행의 주식을 인수한 대우그룹과 GM이 경영권을 대우에 이전하기로 합의하면서 1983년에 대우자동차라는 이름으로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부의 상징, 대우 로얄

1980년 대우자동차의 ‘로얄샬롱’ 엽서1980년 대우자동차의 ‘로얄샬롱’ 엽서1983년 옛 대우그룹이 경영에 참여하면서 출범한 대우자동차는 수많은 명작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배후에는 대우그룹의 총수였던 김우중 회장이 있었는데요. 효율적인 경영을 중시하는 김우중 회장은 페이스리프트를 대우자동차의 초기 전략으로 세웠습니다. 최소 6~7년의 기간이 소요되는 신차 세대교체보다는 추가적인 상품성 개선을 통해 경쟁력을 높이고 신선함을 유지하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결국 대우자동차는 성공적인 페이스리프트를 통해 제품 이미지를 개선하고 판매량을 크게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대우자동차로 하여금 전성기를 맞이하게 한 첫 번째 차량은 GM 산하의 오펠 차량을 베이스로 개발된 대우 로얄(Royale)입니다. 로얄 시리즈는 1980년대 대한민국의 대표 고급차로 인식되어 당시 경쟁 차종이었던 현대자동차의 코티나, 그나라다 등에 우위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로얄 시리즈는 파생 모델을 다수 낳으며 1980년대 대한민국 사회에서 부의 상징으로 불리며 중형 시장을 평정했습니다. 고급차 시장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둔 대우자동차는 1980년대 중반에 들어 비교적 약세를 보였던 소형차 시장에서 도약을 준비했습니다. 이 시기의 대한민국은 급격한 경제성장에 따른 자동차 산업이 성숙되던 시기였고, 자연스럽게 마이카 열풍이 불었습니다. 생애 첫 차로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으면서도 부족하지 않은 동력 성능, 그리고 실용성을 갖춘 소형차의 선호도가 높아 말 그대로 소형차의 전성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월드카 프로젝트, 대우 르망

월드카 프로젝트, 대우 ‘르망’ 자동차월드카 프로젝트, 대우 ‘르망’ 자동차당시 국내 시장 점유율 1위였던 현대자동차는 국내 소형차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포니 시리즈의 후속 모델을 선보이며 선두에 서있었습니다. 이에 대우자동차는 상품으로서 자동차를 개발함에 있어 발생하는 비용과 단가를 낮춰 제품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월드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르망’(Lemans)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르망의 생산은 인건비 측면에서 유리했던 대한민국의 대우자동차에서, 디자인과 설계는 소형차 관련 고급인력이 밀집한 독일 오펠에서, 그리고 판매는 당시 전 세계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던 GM에서 각각 담당했습니다. 서로가 특출한 분야를 전담함으로써 그 시너지는 배가되었습니다. 세 회사의 시너지는 말 그대로 엄청났습니다. 르망은 출시와 동시에 시장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습니다. 르망은 당시 경쟁 자동차에서 보기 힘들었던 날렵한 유선형의 디자인을 갖추고 있었으며, 우수한 달리기 성능과 승차감도 겸비해 특히 젊은 운전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르망은 현대 포니, 엑셀의 판매량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대우자동차가 현대자동차와의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는데 일조했습니다.

대한민국 경차 역사의 시작점, 대우 티코

국민차 사업의 결실, ‘티코’ 광고국민차 사업의 결실, ‘티코’ 광고본격화된 마이카 붐을 이어 가기 위해 한국 정부는 이른바 ‘국민차 사업’을 준비했습니다. 이에 따라 “작지만 실용적이면서도 저렴하게 보급할 수 있는” 국민차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를 위한 사업자로 대우그룹 산하의 대우국민차(1999년 대우자동차에 통합)가 선정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대한민국 최초의 경차가 바로 국민차 티코(Tico)입니다. 티코는 일본 스즈키(Suzuki)와 기술 제휴를 통해 개발된 경차였습니다.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는 국민차 계획을 바탕으로 등장했기 때문에 가장 민감하게 다뤄진 부분은 바로 가격이었습니다. 당시 상공부에서 요구하는 가격대는 200만 원대였는데, 이는 당시 소형 승용차인 현대 엑셀 5도어의 400~500만원 보다 한참 낮은 가격이었습니다. 가격을 맞추기 위해 대우국민차는 편의사양을 덜어내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티코는 빈약한 편의장비에 의심스러운 안전성을 갖춘 차 중 하나가 되었지만, 다행히도 290만원으로 출시 가격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티코의 시장 초기 반응은 미지근한 수준이었지만 1990년대 중반에 들어 본격화된 세컨드 카에 대한 수요 증가, 그리고 IMF 금융위기에 따른 실속 소비 경향이 나타나면서 인기가 서서히 높아졌고, 1995년에는 승용차 판매의 4%를 티코가 홀로 점유하기도 했습니다.

고유 기술의 중요성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우자동차는 나름의 영역은 확보했지만, 여전히 업계 1위의 현대자동차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이에 독자적인 기술 개발보다는 이미 검증된 외부 기술을 사오는 것을 선호했던 대우그룹의 전반적인 성향이 원인으로 지적되었습니다. 대우자동차의 경우 대부분의 주력 제품이 GM을 비롯한 해외 업체의 모델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신차들 역시 완전히 새로운 모델이 아닌 기존 차량을 일부 개선한 페이스리프트 모델이 많았습니다. 이 경우 연비나 주행 특성이 한국 소비자 혹은 도로 사정에 맞지 않거나 최신의 트렌드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곤 했습니다. 결국 고급차 시장을 지배하던 로얄 시리즈 역시 현대 그랜저(1986년)의 등장으로 인해 인기가 크게 떨어졌습니다. 재도약을 위해 대우자동차는 1990년대부터 자체적인 기술력 향상에 힘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결과물이 1990년 최초의 고유모델로 내놓은 ‘에스페로’였습니다.

30여 년 만의 첫 독자 모델, 대우 에스페로

30여 년만의 대우 첫 독자 모델, ‘에스페로’30여 년만의 대우 첫 독자 모델, ‘에스페로’에스페로(Espero)의 스타일링은 당대에는 실로 혁신적이었으나, 출시 초기부터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습니다. 현대의 ‘엘란트라(1990년)’가 준중형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높은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대우 에스페로는 중형세단으로 인식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차의 크기를 그 차의 위신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차체 크기에 민감한 시절이었습니다. 이에 대우차동차는 계획을 변경하여 1991년부터 1500cc급 엔진을 탑재해 준중형차 시장을 공략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에스페로는 준중형급이면서도 중형급의 큰 차체를 강점으로 할 수 있었고, 군더더기 하나 없이 날렵하고 스포티한 스타일 역시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에스페로의 인기도 잠깐 강세를 보였던 중형차 라인업에서는 편안함을 강조한 현대 쏘나타(Sonata)에게 밀렸으며, 대형차 라인업에서도 그랜저를 앞세운 현대자동차에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우그룹의 부채가 대우자동차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92년도 GM이 가지고 있던 지분을 모두 사들이면서 자동차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이를 성공시켰지만, 아무래도 이전부터 기술개발을 해오던 현대자동차 등 다른 한국 기업에게는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대우자동차 = 잔고장”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칭호를 얻기도 했습니다.

에스페로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대우자동차는 1990년대 중반부터 기술 개발 부서를 확장하고 본격적으로 플랫폼 및 파워트레인의 개발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97년은 대우자동차 최고의 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해에 대우자동차는 자체 개발한 고유 모델 3종을 출시했습니다. 소형차인 라노스(Lanos), 준중형차 누비라(Nubira), 중형차 레간자(Leganza)가 인기를 끌며 1998년 상반기 대우자동차는 사상 처음으로 현대자동차를 누르고 국내 자동차 판매량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는 신진자동차 출범 43년, 대우자동차 출범 15년 만에 거둔 짜릿한 쾌거였습니다.

대우의 부도

대우자동차 부도 당시 뉴스 보도 화면대우자동차 부도 당시 뉴스 보도 화면 한국지엠 로고한국지엠 로고
누구나 살면서 전성기와 힘든 시기를 겪듯이 대우자동차의 위기는 최전성기와 함께 찾아왔습니다. 대우자동차 역시 IMF의 영향을 빗겨갈 수 없었습니다. 지속적으로 사세가 기울기 시작하였고 결국 1999년 모기업인 대우그룹이 파산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대우자동차에게 해외 매각 방안을 제시했는데, 이로 인해 노조파업이 심화되기도 했습니다. 대우자동차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 오히려 투자를 확대하기도 하고, 1998년 쌍용자동차를 인수하기도 하는 등 공격적 경영으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효과는 크지 않았습니다. 그룹 전체를 대상으로 구조조정을 실시하고 대부분의 계열사를 매각하는 등 특단의 조치를 취했으나, 대우는 IMF 경제위기라는 큰 벽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분식회계, 대출사기 등의 혐의로 구속될 위기에 처한 김우중 회장이 1999년 해외로 도피하는 사태가 겹치면서 대우자동차를 포함한 대우그룹 전체는 순식간에 몰락했고 결국 2000년 대우그룹은 해체되었습니다.

대우자동차 역사 속으로

이런 악재 속에서도 대우자동차는 ‘마티즈(1998년)’, ‘매그너스(1999년)’, ‘레조(2000년)’ 등의 고유 모델을 꾸준히 출시하며 마지막 사력을 다했습니다. 특히 경차인 마티즈(Matiz)는 당시 IMF 경제위기 속에서 경차 붐이 일어 특수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몰락한 대우의 브랜드 이미지는 나빠질 대로 나빠졌고 소비자들은 대우차를 사는 것을 점차 꺼려, 그 판매량 역시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대우는 현대는 물론, 기아자동차에도 밀려 업계 3위 이하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2000년 11월, 대우자동차는 최종 부도 처리되어 생산라인의 한국지엠 로고 가동이 중단되었습니다. 이런 대우자동차를 당초 미국 포드(Ford)에서 인수를 고려해 협상을 진행했으나 포드는 대우자동차의 인수를 최종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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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대우자동차는 다시 미국 GM에 인수되면서 2002년 10월 ‘GM 대우(지엠대우오토앤테크놀로지)’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 버스 부분은 영안모자에서 인수해 ‘자일대우버스’로, 트럭 부분은 인도의 타타그룹이 인수해 ‘타타대우상용차’로 사명을 변경했습니다. 이후 GM대우는 주로 경소형차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나, 의욕적으로 출시한 준중형급 신차는 시장에서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변화가 절실했던 GM대우는 2011년에 세계적인 브랜드 쉐보레(Chevrolet)를 도입하고 사명에서 대우를 완전히 뺀 ‘한국지엠’(GM Korea)으로 회사명을 바꿨습니다. 이로써 승용차 브랜드로서의 ‘대우’는 사실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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