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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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

강홍구, 2021년 02월 18일

현대그룹(Hyundai Group)은 삼성그룹과 함께 대한민국 경제 성장에 큰 영향을 끼친 기업입니다. 특히, 현대건설과 한때 전 세계 5위를 기록한 완성차 업체인 현대자동차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업적을 세운 대한민국의 기업인이 있습니다. 바로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입니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어 왕회장이라는 별명도 붙여졌습니다. 당시 날고 긴다는 재벌들도 쉽게 넘보지 못했던 현대그룹을 이룩한 인물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현대그룹 정주영 왕회장의 편년사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회장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회장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아산에서 출생
1940년 아도서비스(Art Service) 자동차 정비 회사 설립
1946년 4월 현대자동차공업 설립
1947년 현대토건사 설립
1967년 현대자동차 설립
1971년 현대자동차, 현대건설, 현대시멘트 등을 총괄해 현대그룹 창립
1973년 현대조선중공업 설립
197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역임
1982년 제27대 대한체육회 회장 역임
1987년 12월 현대그룹 명예회장 추대
1992년 국민당 총재, 비례대표 국회의원 당선
1993년 국민당 해체, 국회의원 사퇴
1994년 한국지역사회교육중앙협의회 이사장 취임
1998년 현대건설 명예회장 역임
2001년 3월 21일 86세 나이로 별세

유년시절, 될성부른 떡잎

청년 시절의 정주영청년 시절의 정주영정주영(鄭周永, Chung Ju-yung)은 1915년 11월 15일에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에서 정봉식과 한성실의 6남 2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운 뒤 통천소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정주영은 부모처럼 가난한 농부가 되기 싫어 네 번이나 가출을 했습니다. 그는 가출 후 철도공사장에서 막일을 하거나, 사기꾼에게 노잣돈을 털리고는 아버지에게 끌려오기 일쑤였습니다. 결국 19살이 되던 늦은 봄에 오인보라는 친구와 서울행 기차를 타고 네 번째 가출에 성공했습니다. 서울까지 올라온 이들은 객지에서 막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함께 있으면 불편하다는 이유로 친구는 서울에 남고, 정주영은 인천으로 떠났습니다.

그는 인천에 도착해서도 인천 부두의 하역일과 막노동 등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일했습니다. 하지만, 인천 부두 지역의 노동일이 불안해지자 얼마 후 다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서울에서도 막일꾼으로 품을 팔다가 복흥상회라는 쌀가게에 취직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쌀 한 가마니 값의 월급을 받으며 식사도 그 집에서 해결했습니다. 쌀가게에서 일한 지 3년째 되는 어느 날 주인 영감은 그간 배달을 하며 신용도를 얻은 정주영에게 가게를 꾸리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렇게 쌀가게를 물려받은 정주영은 경일상회로 이름을 바꾸고 배화여고와 서울여상 기숙사에 쌀을 대면서 조금씩 돈을 벌었고, 황해도 연백 등 쌀 산지에서 쌀을 매입해 서울에서 도매와 소매를 겸했습니다. 그는 고향에 논 30마지기를 사들일 수익금을 벌어들여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아도서비스

아도서비스(Art Service) 공장아도서비스(Art Service) 공장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쌀가게 이후 기업의 씨앗을 처음 뿌린 곳은 건설이 아닌 자동차였습니다. 1940년 정주영은 일생을 걸 만한 사업을 찾아 헤매던 중 쌀가게 단골이자 서울 최대의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이었던 이을학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정주영은 “일본의 통제를 받지 않는 사업이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이을학은 아현동에 있는 자동차 수리공장인 아도서비스(Art Service)를 제안하였고, 산골 소년인 정주영은 정비 업체 사장이 되었습니다. 아도서비스는 설립 후 1년 만에 350여 평의 공장과 60여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큰 업체로 성장했습니다. 사실 발음은 아도가 아닌 아트(Art)이지만, 일본인들이 발음을 못 해 일본식 발음으로 표기했습니다. 세도가인 윤덕영의 올즈모빌과 여러 일감들이 밀려들었지만, 그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가 자동차 일을 배우겠다는 열정으로 도색 일을 배우며 밤을 지새우던 중, 한 직원이 세숫물을 데우려다가 신나통에 그만 불이 옮겨붙는 바람에 화재가 발생해 삽시간에 공장이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날린 그는 3,500원을 빌려 신설동 빈터에 무허가로 수리공장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찾아와 무허가 공장의 문을 닫으라는 경찰의 으름장에 동대문서 보안계장을 한 달 동안 쫒아 다니며 제발 눈감아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그는 수리공장이 자동차 수리 기간을 길게 잡아 바가지를 씌우는 관행이 아니라, 수리 기간을 단축하고 높은 수리비를 청구했습니다. 그는 차근차근 돈을 모아 빚을 모두 갚았습니다. 하지만 1942년 일제의 기업 정비령에 의해 공장을 빼앗기다시피 한 채로 다시 거리로 내몰렸습니다. 그렇게 1943년 3월에 정주영의 수리공장인 아도서비스는 종로 5정목의 일진공작소에 내어주어야만 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따라 손을 놓게 된 정주영은 보광광업주식회사의 황해도 수안군 소재 홀동금광과 광석 운반 하청 계약을 맺고, 화물트럭 40여 대를 구입하여 2년 동안 광석 운반을 했습니다. 결국, 그는 해방 직전인 1945년 5월에 홀동금광 하청권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현대건설,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역사

현대건설㈜(Hyundai Engineering) 로고현대건설㈜(Hyundai
Engineering) 로고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
현대중공업,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자동차, 현대카드, 현대건설 등 많은 현대의 기업들이 모두 세계적인 대한민국 대표 기업인 현대그룹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현대(現代)라는 상호를 처음 사용한 것은 1946년 4월에 서울시 중구 초동에서 정주영이 설립한 현대자동차공업부터입니다. 하지만, 관청에 들렀다가 건설업자들이 공사대금으로 뇌물을 받는 것에 충격을 받고, 현대토건사라는 건설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1년 후인 1947년 5월 25일 현대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현대건설을 설립했습니다. 이후 1950년 1월에 두 회사를 합병하여 필동에서 현대건설주식회사로 새 출발을 했습니다. 당시 전쟁의 여파 속에서 동아일보 기자였던 둘째 동생 정인영이 미군 공병대의 통역을 맡은 것이 계기가 되어 미군 숙소를 짓는 일에 손을 보태며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1957년 9월 현대가 한강 인도교 공사 기회를 얻어낸 것은 국내 건설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계기가 되었으며, 1962년에 국내 도급순위 1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1967년에는 일본 기술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양강의 콘크리트댐을 사력댐으로 바꿔 예산을 절감했습니다.

현대건설이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공항 공사를 수주하여 중동 신화의 서막을 열었던 것은 1976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또한, 2년 5개월 만에 착공한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전 세계 최단기간 완공이라는 업적을 세우기에 충분했습니다. 당시 한국 현대사에서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경부고속도로는 단일 노선으로, 서울과 부산을 4시간 20분 만에 주파할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 초에는 일명 ‘정주영 공법’으로 불리며, 세계적 관심사가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도 회자하는 이유는 서산 간척사업에서 조수간만의 차이로 20만t 이상의 돌을 구입하여 매립해야만 물막이가 가능했지만, 공사비 절감과 공기단축을 위해서 정주영 왕회장이 직접 유조선에 올라 진두지휘하여 유조선 공법을 선보였기 때문입니다. 돌 대신 폐유조선을 바다에 침몰시켜 물막이 공사를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1981년에는 불가능하다는 예상을 뒤엎고 서울올림픽 유치위원장을 맡아 5개월 만에 서울을 올림픽 개최도시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첨단전자 분야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1983년에 현대전자를 설립하여 세계적인 반도체 회사로 성장시켰습니다.

현대자동차의 설립과 발전

현대자동차㈜(Hyundai Motor) 로고현대자동차㈜(Hyundai Motor) 로고 ‘포니 정’ 정세영 회장‘포니 정’ 정세영 회장
정주영 회장은 1967년에 현대자동차㈜(Hyundai Motor Company)를 설립하여 넷째 동생인 정세영에게 맡겼습니다. 그는 울산공장을 착공하고 미국 포드자동차와 제휴하여 포드 코티나(Cortina) 승용차를 생산했습니다. 1974년 한국 최초의 국산 자체 모델인 포니(Pony)를 개발했습니다. 1976년에 에콰도르에 포니 6대를 수출하여 한국이 자동차 수출국 반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현대자동차의 포니는 한국을 세계에서 16번째로 자동차 고유 모델을 보유한 나라로 각인시켰습니다. 포니는 출시된 첫해에는 10,726대를 판매했고, 이후 1982년까지 약 30만 대 가량 생산되었습니다. 현대의 자동차 제조업은 순수 국산 자동차 1호인 포니를 제작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1억 달러가 넘는 큰 돈을 투자하여 연산 5만 6천 대 규모의 국산 자동차 공장을 착공했습니다.

‘포니 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정세영 회장은 1987년부터 1996년까지 현대그룹의 회장 겸 현대자동차 회장을 지낸 후, 아들인 정몽규에게 현대자동차 회장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현대자동차의 명예회장으로 물러나려고 했습니다. 그는 현대자동차의 개인 주주 중에서는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30년의 세월 동안 현대자동차를 이끌어온 것을 생각하면 현대자동차 경영권을 계속 가져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를 본 정주영의 아들들은 현대자동차를 숙부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위기를 느낀 정세영 회장은 현대자동차의 덩치가 계속 커지면 경영권을 가져오기 힘들다고 생각하여 기아자동차를 인수하지 않으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1998년 12월에 조카인 정몽구가 현대자동차 회장으로 취임하게 되고, 아들인 정몽규는 부회장으로 밀려났습니다. 또한, 현대자동차는 기아자동차를 인수하고 국내 최대 자동차 업계가 되었습니다. 정세영 회장은 포기하지 않고 우호 지분을 끌어모아 주주총회에서 조카인 정몽구 측 인사들의 이사 선임을 저지하는 등 끝까지 현대자동차의 경영권을 사수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세영 명예회장은 “몽구가 장자인데 몽구에게 자동차를 넘겨주는 게 잘못됐어?”라는 장군 경영 스타일의 형인 정주영 왕회장 말에 깔끔히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1999년 3월 5일에 기자회견을 가지고 정몽구의 현대산업개발 지분과 현대자동차 32년 경력의 지분을 맞바꾸기로 했습니다. 현대자동차 회장 이임식에서 눈물을 훔친 그는 형인 정주영 회장을 원망할 법도 하지만, 형에 대해 여전히 ‘존경하는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정주영 회장이 별세하자 가장 크게 대성통곡했던 인물도 정세영 회장이었습니다. 당시 정주영 회장은 사업적인 부분에서는 냉엄한 보스이지만, 기업 외적인 부분과 자신의 동생들을 많이 챙겼다고 합니다. 이후, 미우나 고우나 현대자동차의 회장 자리를 물려받은 정몽구 회장은 2020년 7월에 헨리 포드(Henry Ford), 알프레드 슬론(Alfred Sloan), 고틀리프 다임러(Gottlieb Daimler), 엔초 페라리(Enzo Ferrari) 등이 올라있는 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릴 만큼 훌륭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대통령 출마와 통일소 방북

1,001마리의 ‘통일소’ 방북1,001마리의 ‘통일소’ 방북정주영 왕회장은 1987년에 현대그룹 회장 자리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며, 현대그룹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후 국민당을 창당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전국구 국회의원을 역임하였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낙선하여 여러 가지 정치 보복 등의 곤욕을 치른 이후론 정치계와는 완전히 담을 쌓았습니다. 이후 1998년에 정주영 회장은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과 계획이 일치하여 직접 ‘통일소’라고 불리는 500마리의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통과하고, 총 1,000여 마리의 통일소를 몰고 그리운 고향에 방북하는 등 금강산 관광 사업과 개성공단 사업에도 주력했습니다. 프랑스 문명 비평가인 기 소르망(Guy Sorman)은 방북 장면을 보고 “20세기 마지막 전위예술”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왕자의 난

현대가 정몽헌(왼쪽), 정몽구(오른쪽) 형제현대가 정몽헌(왼쪽), 정몽구(오른쪽) 형제2000년 5월 그는 건강을 이유로 명예회장직마저 사퇴했습니다. 하지만, 그 유명한 현대판 ‘왕자의 난’ 사건과 자녀들 간의 불화가 일었습니다. 정주영은 병든 몸을 이끌고 자식들 간의 불화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3부자 동반 퇴진’을 통하여 이사회와 전문경영인 중심의 투명한 경영을 발표했습니다. 그럼에도 세 아들 편에 줄을 선 가신들의 농간과 함께 현대는 현대그룹, 현대백화점,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으로 분리되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2001년 3월 21일 폐렴으로 인한 급성호흡부전증으로 향년 85세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공식적으로 세간에는 1922년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10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는 여담이 있습니다. 향후, 가신들의 농간을 잊지 않은 정주영의 차남이자 현대자동차를 이끄는 정몽구 회장은 이때의 일을 증오하여 선대의 가신들을 냉정히 쳐냈습니다. 이에 오랜 기간 동안 가신들은 그를 ‘무원칙 인사’라고 비평하며, 믿지 않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대개 ‘왕자의 난’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많이 다루는 것처럼, 재벌 2세들이 아버지의 재산 상속이나 경영권 승계를 두고 갈등을 빚을 때, 마치 왕자들이 후계자 자리를 놓고 다투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현대그룹은 2000년부터 2010년까지 경영권 계승을 둘러싸고 정주영 회장의 아들들이 벌인 왕자의 난이 있었습니다. 이 왕자의 난은 정주영 회장의 별명이 왕회장이어서인 것도 한몫했습니다. 사람들은 한국에서 재벌가의 왕자의 난을 언급하면, 대개 현대그룹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때 현대가 재계 1위에 등극한 굴지의 대기업이었고, 경영권을 둘러싸고 왕자들이 격돌한 결과 제국에 비유한 현대그룹이 여러 개의 작은 회사로 나눠진 것이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버지를 끌어내리려 했던 여타 기업들과 달리 현대가의 왕자의 난은 차남인 정몽구와 5남인 정몽헌 형제끼리의 싸움이었습니다. 정몽구와 정몽헌은 자신의 아버지인 정주영 왕회장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당시 정주영 회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며 명예회장으로 추대된 뒤, 현대그룹은 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회장의 불안한 공동회장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정몽구 회장은 현대그룹의 자동차 부문, 정몽헌 회장은 건설과 전자 및 증권 부문을 가져갈 예정이었습니다. 당시 차남인 정몽구 회장은 장남인 정몽필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후부터 실질적인 장남의 위치였습니다. 또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 때문에 아버지 정주영 회장을 대신해서 옥살이를 했을 정도로 현대그룹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습니다. 그는 당시 최고의 기업이었던 현대건설과 현대전자를 아버지의 신임을 얻은 정몽헌 회장이 가져가는 것에 대해 탐탁지 않아 했습니다. 그러던 중 2000년 3월에 정몽구 회장은 정몽헌 회장이 해외 출장을 가자 현대증권 이익치 회장을 고려산업개발로 전속 보직시키며 패권 다툼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습니다. 이익치 회장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가신그룹 일원이자 정몽헌 회장의 측근이었습니다. 해외 출장에서 돌아온 정몽헌 회장은 자신의 측근인 이익치 회장, 현대건설 김윤규 사장, 현대그룹 김재수 구조조정본부장 등을 모아 이익치 회장의 인사 발령을 무효화하고 정몽구 회장의 그룹 공동회장직을 박탈했습니다. 이에 정몽구 회장은 아버지 정주영 명예회장을 찾아가서 회장직 복귀 명령을 받아냈지만, 몇 시간 뒤에 정몽헌 회장이 다시 측근들을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가 그 명령을 무효화시켰습니다. 당시 정주영 명예회장은 고령의 나이로 판단력이 흐려져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2000년 3월 27일에 정주영 명예회장이 직접 현대경영자협의회에서 ‘정몽헌 단독 회장 체계’를 공식 승인하면서 왕자의 난은 정몽헌 회장의 승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에 정몽구 회장은 자동차 관련 계열사를 가지고 현대자동차그룹을 만들어 현대그룹으로부터 계열 분리했습니다. 이후 현대자동차그룹은 승승장구하는 반면에 정몽헌 회장의 현대그룹과 현대건설 등은 큰 어려움을 맞이했습니다. 심지어 정몽헌 회장은 정주영의 숙원사업이었던 대북 사업과 관련하여 4억 5,000만 달러를 북한에 은밀히 송금한 사건으로 검찰 수사를 받는 등 여러 악재가 겹쳤습니다. 결국, 정몽헌 회장은 2003년 8월 4일에 서울 종로구 계동에 있는 사옥 12층 화장실에서 투신자살했습니다. 이후 위기를 맞은 현대건설은 정몽구 회장이 이끄는 현대자동차그룹이 인수하였습니다.

현대가(家), 경영권 승계구도

정주영 회장의 별세 1년 전인 2000년에는 이른바 ‘왕자의 난’이 벌어지며 현대그룹은 형제와 아들들에 의해 나뉘었습니다. 정주영 회장 바로 아래 동생인 정인영 한라그룹 명예회장은 1953년 현대건설에 입사해 형인 정주영 회장과 함께 현대그룹을 일궜지만, 1977년에 한라그룹의 전신인 현대양행으로 독립했습니다. 당시 3남인 성우그룹 정순영 회장은 1969년에 현대건설에서 독립한 현대시멘트를 이끌었습니다. 또, 포니정으로 불린 4남인 정세영 회장은 1957년에 현대건설로 입사한 뒤 1967년에 초대 현대자동차 사장에 취임하여 32년간 자동차 수출 신화를 이루어 냈습니다. 그는 1999년에 조카인 현대자동차그룹 정몽구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기고, 아들인 HDC 정몽규 회장과 같이 현대산업개발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현대가의 가계도현대가의 가계도

한국전쟁 당시 정주영 가족사진한국전쟁 당시 정주영 가족사진정주영 왕회장의 동생 중 마지막으로 별세한 KCC 정상영 회장은 1958년 8월에 금강스레트공업이라는 이름으로 KCC를 창업했습니다. 2003년에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KCC 정상영 회장은 조카며느리인 현정은 회장과 경영권 분쟁을 벌였지만 결국 패했습니다. 한편 다섯째 동생인 정신영은 1962년에 30대 초반이라는 나이로 독일에서 교통사고로 별세했고, 유일한 여동생이자 한국프랜지공업 김영주 회장의 부인인 정희영 여사는 2015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주영 회장의 장자인 현대자동차그룹 정몽구 회장은 동생인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과 벌인 ‘왕자의 난’ 끝에 현대자동차 계열 회사만 들고 갈라섰습니다. 2020년 10월 정몽헌 회장은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직을 아들인 정의선 회장에게 물려주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정주영 회장에게서는 서자들에 대한 차별이 일절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는 현대그룹 후계자였던 정몽헌 회장부터 정실의 자식이 아닌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담으로 현대가의 자녀들은 정주영 회장이 별세하는 그 날까지 아버지를 어려워하는 등 하늘처럼 우러러봤다고 합니다. 정주영 회장의 어록 중에서 “시련이란, 뛰어넘으라고 있는 것이지 걸려 엎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어록이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가장 그답게 잘 표현했을 뿐더러 살아생전 왕회장의 카리스마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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