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이야기
강지연, 2020년 12월 28일
헨리 포드는 1863년 7월 30일 미국 미시건주 디트로이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디어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 디어번은 개발이 전혀 이뤄지지 않은 시골 마을로 그 지역의 주민들은 모두 농업에 종사하는 농부였습니다. 헨리의 아버지인 윌리엄 포드도 마찬가지로 농부였으며, 헬리 포드는 농부의 아들이었습니다.
헨리 포드는 농사일보다 기계나 공학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기계를 보면 눈을 반짝이며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며 기계에 대한 흥미를 키워나갔습니다. 그는 어린나이부터 토머스 에디슨 같은 발명가나 유명한 과학자인 패러데이를 존경하며 자신의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하지만 청소년 시기에 유일하게 자신의 꿈을 응원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고, 농부인 아버지와의 갈등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더는 버티지 못한 헨리 포드는 학업을 중단하고 15살의 어린 나이에 가출을 하였습니다.
포드 모델T 자동차와 헨리 포드(Henry Ford)
1908년 9월 27일 포드는 모델T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자동차란 사치품이자, 소수의 부유층만이 소유할 수 있을 정도로 비쌌기 때문에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하지만 헨리 포드는 “우리는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만들겠습니다. 가족 또는 개인이 운전이든 정비든 손쉽게 할 수 있는 자동차입니다. 현대 기술을 총동원하여 가장 단순하면서도 최고의 성능과 재질을 가진 차를 만들겠습니다. 그 가격은 어지간한 봉급 생활자라면 누구나 구입할 수 있을 만큼 쌉니다.” 라며 모델T 자동차를 광고했습니다. 모델T 자동차 가격은 당시 냉장고 가격보다 더 저렴했다고 합니다. 포드사에서는 앞으로 오직 모델T 하나만을 생산할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대담한 광고에 경쟁업체 관계자들은 “포드가 망하려고 작정을 했군!”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부유층은 단조로움보다는 개인적 취향에 따라 이것저것 선택하여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를 바랬는데 포드의 이와 같은 선언은 불가능한 이상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포드와 함께 자동차 회사 ‘포드’를 설립한 동업자 알렉산더 맬컴슨도 그의 목표를 실현할 수 없는 꿈이라 치부했습니다. 결국 포드와 의견을 좁히지 못한 맬컴슨은 포드에 있는 자신의 주식을 팔고 포드사를 떠났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의 우려대로 포드의 운명은 망하는 길로 접어들었을까요? 그로부터 몇 달 뒤 포드의 모델T는 자동차 사상 최초로 연간 판매량 1만 대를 돌파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세는 꺾일 줄 모르고 1911년에 3만대를, 1913년에는 10만대를 기록했으며, 더 나아가 유럽과 호주에서도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수치는 전 세계의 자동차 100대 중에 68대가 포드의 모델T일 정도였습니다. 말 그대로 ‘대성공’을 이뤄낸 포드는 어떻게 모두의 예상을 뒤집을 수 있었을까요?
마이카 시대의 개막은 포드 시스템 덕분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요. 포드 시스템의 핵심인 컨베이어 벨트(conveyor belt)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5세기 광산업이 태동하던 시기부터 체인 버킷을 사용하여 부피가 큰 물체를 운반한 버킷 컨베이어는 중요한 기술 혁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단순한 기계를 발전시킨 것이 바로 컨베이어 벨트입니다. 1,700년대 초에는 평평한 나무 판자 위에 물건을 올려 운반하거나 광산업에서 광물을 운반하는 용도로 컨베이어 벨트가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벨트에 사용된 가죽이나 무명을 고무로 교체하고, 기계적인 요소들이 적용되어 기능이 더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헨리 포드는 1913년부터 포드 공장에 컨베이어 벨트를 사용해 생산라인을 구축했습니다. 이를 적용한 첫 모델이 바로 포드의 모델T 차량으로 원가절감에 성공하여 기록적인 매출성장률을 달성하였습니다. 게다가 부품의 규격을 통일화하여 부품의 집중 생산을 가능하게 하였고, 부품 생산에서도 대량생산 체제를 실현하였습니다.
포드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컨베이어 벨트뿐만 아니라 이동조립법도 있습니다. 이동조립법이란 일에 사람을 가져가는 대신 사람에게로 일을 가져가는 생산 시스템 기법입니다. 즉, 노동자 앞에 부품이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통과하면 각 노동자는 제자리에서 일정한 속도로 작업에 임하는 생산 시스템을 뜻합니다. 한번의 멈춤 없이 계속되는 생산 시스템이라는 의미로 플로 작업 시스템(flow production system)과 컨베이어 시스템(conveyor system)으로도 불리기도 합니다. 헨리 포드가 확립한 포드 시스템은 대량생산을 통해 자동차 산업의 혁명을 실현시켰으며 효율적인 표준을 만들었습니다. 포드 시스템은 많은 공장에서 채택되어 적용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급진적인 발전을 야기했습니다. 오늘날의 공장에서도 포드 시스템은 없어서는 안될 존재입니다.
한 소년이 헨리 포드에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이젠 세상이 달라졌어요. 지금은 ‘현대’란 말이에요.” 그러자 포드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얘야, 그 ‘현대’를 발명한 게 나란다.” 이처럼 포드는 오늘날 중산층 기반의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 문명을 연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9세기까지의 근대 사회가 소수의 귀족들을 위한 문명이었다면, 20세기 현대 사회는 신분의 차이가 없는 대중들의 사회입니다. 헨리 포드가 도입한 컨베이어 벨트에 기반한 대량생산 시스템은 자동차 산업뿐 아니라 다른 여러 산업으로 퍼져나가면서, 현대 사회의 특징을 형성했습니다. 노동자가 창의성을 발휘하기보다는 기계에 예속된 부품과 같은 존재로 전락하면서 노동 소외가 발생했는데, 이것 역시 포드 시스템의 결과물이었습니다.
포드는 미국의 중산층을 만든 사람입니다. 포드는 노동자에게 파격적으로 높은 급여를 지급했습니다. 1914년 그가 채택한 하루 8시간 근무하고 ‘일당 5달러’를 지급하는 정책을 세웠는데, 당시 철강 공장 노동자들이 하루 12시간 일하고 1달러를 받았다고 하니, 시급 기준으로 약 7.5배를 더 준 셈입니다. 당시 시사만평을 보면 포드 공장의 노동자들은 모피를 입고 기사가 모는 자가용을 타고 포드 공장에 일하러 가는 것으로 묘사될 정도였습니다. 주 5일제 40시간 근무제도를 처음 실시한 사람도 포드였습니다. 당시 포드 공장에 취직하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공장 정문에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심지어 일부는 문을 넘어 공장으로 들어오려고 하여 경비를 고용하기도 했습니다. 헨리 포드는 아일랜드계 백인으로서 흑인에 대해서도 백인과 동등하게 대우하고 장애인을 배려하는 등 좋은 일터를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맹인이나 두 팔이 없는 사람까지 고용하여 동등한 급여를 지급했다고 합니다.
에드셀 포드(Edsel Ford, ‘에셀 포드’라고도 함)는 헨리 포드의 유일한 아들로서 뛰어난 기술자이자 경영자였습니다. 그는 1919년 불과 25세의 젊은 나이에 포드사 사장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경영철학은 자신의 아버지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는데, 디자인을 강조하며 고급 자동차를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모델T 단일 품종의 생산만을 고집하지 않고 경쟁사인 제너럴모터스(GM)처럼 차의 성능보다 디자인을 강조하고, 다양한 모델을 선보일 필요성을 주장했습니다. 이후 에드셀 포드가 주도하여 새로운 모델A를 출시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또한 1927년 링컨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고 1930년대에 포드사의 대표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경제가 많이 어려운 상황에서 노동조합을 수립하겠다는 노동자들의 요구와 집단 파업이 지속적으로 일어났고, 결국 헨리 포드는 1941년 노조의 설립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중들은 헨리 포드에 대해 나치의 협력자라는 비난을 퍼부었고, 포드사의 비인간적인 노동 시스템을 질타하는 지식인들도 나타났습니다.
1922년 헨리 포드는 독일 히틀러의 나치당에 정치자금을 기부했습니다. 헨리 포드는 심한 반유대주의자였으며 ‘국제 유대인’이라는 저서를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히틀러는 헨리 포드의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아 헨리 포드의 초상화를 자신의 사무실에 걸어두기도 했다고 합니다. 1938년 헨리 포드는 당의 초창기에 아낌없이 베푼 재정적 기여에 보답하는 의미로 나치당에서 대십자 훈장을 받은 일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화는 포드의 발목을 잡는 사슬이 되었습니다. 1929년 세계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의 시기를 맞이하면서 포드 회사 역시 큰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943년 5월 25일 아들인 에드셀 포드가 위암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헨리 포드는 사망한 아들을 대신해서 부득이하게 81세의 나이로 다시 포드사의 회장직에 취임했지만 그가 경영을 지속할수록 회사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행정부는 전쟁 중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포드사를 국유화하고자 기회를 노렸습니다. 말년에 겹친 악재에 시달린 헨리 포드는 1945년에 은퇴하고 손자인 헨리 포드 2세(Henry Ford II)가 대표로 취임했습니다. 헨리 포드는 은퇴 2년 후인 1947년 4월 7일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포드는 미국의 억만장자로서, 본인이 살아 있을 당시에 재산이 10억 달러가 넘었는데, 이는 록펠러, 카네기, J.P. 모건 등의 재산보다 더 많은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헨리 포드가 가졌던 나치당에 대한 신념과 효율성만을 극대화한 경영철학은 비판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일궈낸 자동차의 혁명과 현대 문명으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헨리 포드 박물관(Henry Ford Muse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