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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의 즐거움, 비엠더블유(BMW)

이성정, 2021년 01월 11일

비엠더블유(BMW)비엠더블유(BMW)
전 세계 자동차 마니아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완벽한 상위 완성차 기업 비엠더블유(BMW)에 대해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BMW는 1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기업으로, 자동차의 역사와 함께 시작했다고 봐도 될 정도입니다. 역사가 깊고 오래된 만큼 할 이야기도 많고, 재밌는 이야기도 많겠죠? 그럼 지금부터 BMW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BMW의 역사

비엠더블유(BMW)는 세단, 컨버터블, 스포츠카, SUV, 모터사이클 등을 제조 판매하고 있는 독일의 자동차 회사입니다. BMW의 유래는 1913년 카를 프리드리히 라프(Karl Friedrich Rapp)가 독일 공군에게 엔진을 납품하기 위해 뮌헨 지역에 항공기 라프 모토렌 베르케(Rapp Motoren Werke)를 설립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916년 경영 위기에 처한 라프 모토렌 베르케를 오스트리아 태생 엔지니어 프란츠 요세프 포프(Franz Josef Popp)와 그의 동업자인 막스 프리츠(Max Friz)가 인수하여 항공기 엔진 회사인 BFW(Bayerische Flugzeug Werke AG)를 설립했습니다. 1917년 회사 이름을 바이에리셰 모토렌 베르케(Bayerische Mortoren Werke)로 변경하면서 이때부터 약자인 BMW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BMW는 영어로 읽으면 ‘비엠더블유’이고, 독일어로 읽으면 ‘베엠붸’가 됩니다. 승승장구를 이어가던 BMW는 1914년부터 1999년까지 이어졌던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배로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서 항공기 엔진을 더이상 생산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BMW는 항공기 엔진에서 모터사이클로 사업 영역을 바꾸면서 1928년 자동차 산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BMW DixiBMW Dixi 스포츠카의 전설 ‘BMW 328’스포츠카의 전설 ‘BMW 328’
1929년 BMW의 첫 자동차인 BMW Dixi를 생산하였습니다. 이후 BMW는 1933년에 6기통 엔진이 장착된 BMW 303을 출시하였습니다. BMW 303에서 프로펠러 엠블럼과 키드니 그릴이 처음으로 적용되었는데, 이 엠블럼과 그릴은 이후 BMW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었습니다. BMW 303의 출시는 1926년 경쟁업체인 다임러-벤츠(Daimler-Benz)의 합병 시도를 막아내었고, 합병이 아닌 경쟁구도로 바뀌면서 1933년 두 회사 간의 합병 계약이 무산되었습니다.

BMW는 레이싱카 분야에도 큰 관심을 보였는데요. 1936년 BMW는 항공기를 모티브로 하여 유선형 모양으로 디자인된 2인승 레이싱카인 BMW 328을 출시했습니다. BMW 328은 강철 프레임을 바탕으로 섬세하게 제작된 리어 액슬(Rear Axle), 전방 독립식 서스펜션을 탑재하여 이 당시 BMW의 모든 기술력을 동원하여 제작한 차량이라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BMW의 모든 기술을 집약한 BMW 328은 1936년부터 1940년까지 172개 경주에 출전하여 무려 141 차례 우승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거두었습니다. 특히, 1938년 1000마일을 달리는 이탈리아의 밀레 말리아 경주에서는 평균 속도 166km/h라는 기록을 세우며 우승하여 그 스피드와 내구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BMW를 세상에 더욱 각인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과 BMW

BMW 재기의 발판 ‘BMW R24’ 오토바이BMW 재기의 발판 ‘BMW R24’ 오토바이BMW 역사를 논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시기가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던 시기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던 1939년부터 1945년까지 BMW는 레이디얼 엔진(Radial Engine)인 BMW 801, BMW 132와 오토바이를 제작하여 독일 공군에 납품했습니다. 이 밖에도 메서슈미트 Me 262 슈발베의 엔진을 납품하는 등 여러 물자를 납품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독일 기업이 전쟁 물자 생산을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BMW 역시 이러한 이유로 전범 기업이라는 좋지 못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항공기 엔진과 로켓을 생산한다는 이유로 BMW는 유로 연합국에 징계를 받아 3년 동안 생산 금지 명령을 받았고, 전범 기업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와 공장이 폭격을 맞아 상당 부분 파괴되는 등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하여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심지어 BMW 503을 비롯하여 새롭게 출시된 BMW의 고급차 라인업이 당시 독일 실정과 맞지 않아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은 더 커졌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굴하지 않고 BMW는 오토바이 라인인 BMW R24를 출시하면서 성공적인 성과를 기록하여 BMW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BMW의 성공

이후 1972년 출시한 BMW 5시리즈가 크게 히트하면서 BMW는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브랜드 인지도가 높아졌으며, 1975년 출시한 BMW 3시리즈와 1977년 출시한 BMW 7시리즈가 연이어 좋은 결과를 달성하면서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하였습니다.

2016년 BMW는 회사 창립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독일 국내에서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인 ZF 프리드리히샤펜 AG(ZF Friedrichshafen AG)와 협력하여 현재 BMW의 후륜구동 차량에는 거의 ZF의 자동변속기가 장착되고 있습니다. 2019년 기준 BMW의 생산량은 약 256만대, 수익은 약 1,042억 유로, 영업 이익은 약 7,400억 유로, 순이익은 약 50억 2,200만 유로, 총 자산은 약 22만 8,000억 유로, 직원은 13만 3,700여 명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숫자들은 BMW가 메르세데스-벤츠, 아우디 (Audi)와 함께 독일의 3대 고급차 제조사로 손꼽히는 이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BMW의 주요 인물

프란츠 요세프 포프(Franz Josef Popp)프란츠 요세프 포프(Franz Josef Popp)BMW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봤다면, BMW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서 알아봐야겠죠? 우선 BMW의 설립자들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BMW 공동 설립자 중 한 명인 프란츠 요세프 포프(Franz Josef Popp, 1886년~1954년)는 1886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습니다. 1901년 가족과 함께 체코로 거주지를 이전하여 체코에서 그래머 스쿨(Grammar School)을 졸업했습니다. 이후 1909년 전기공학과 기계공학의 공동 학위를 취득하고, 오스트리아 빈으로 돌아와서 전자제품 제조업체인 AEG(Allgemeine Elektricitäts-Gesellschaft)에서 근무했습니다. 근무를 하면서 프란츠 요세프 포프는 감독관으로 하청업체인 엔진 제조업체 라프 모토렌 베르케에 장기 파견되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열약한 생산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투입된 막스 프리츠(Max Friz)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16년 라프 모토렌 베르케가 경영난을 겪자 그는 막스 프리츠와 함께 경영권을 인수했습니다. 1917년 BMW로 회사 이름을 바꾸어서 1918년 주식회사로 상장시켰습니다.
막스 프리츠(Max Friz)막스 프리츠(Max Friz)다음은 공동 설립자인 막스 프리츠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막스 프리츠(Max Friz, 1883년 10월 1일~1966년 6월 9일)는 전문적으로 엔진 설계를 하는 독일 기계 엔지니어입니다. 그는 1917년 BMW 설립 시 엔진 설계 및 혁신의 핵심 공헌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막스 프리츠는 1898년부터 칸스탄트의 쿤(Kuhn) 증기기관 회사에 견습생으로 근무하였으며, 1902년 자신의 공학기술을 더욱 발전시켜서 슈투트가르트-에슬링겐에 있는 로얄 빌딩 무역 학교에 등록하는 등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1906년에는 디자인 오피스에서 다임러 모토렌 게셀샤프트(Daimler Motoren Gesellschaft)에 고용되어 1914년 프랑스 그랑프리 대회에서 우승한 메르세데스 그랑프리 자동차의 레이싱 엔진을 설계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이후 독일 뮌헨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혁신적인 카뷰레터와 다양한 기술적 세부사항을 갖춘 에어로 엔진을 설계하였습니다. 이 엔진은 다른 독일 항공기 엔진보다 우수하였고,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 엔진은 ‘BMW llla’라는 명칭으로 개명되었습니다.
올리버 집세(Oliver Zipse)올리버 집세(Oliver Zipse)지금까지 BMW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공동 설립자에 대해서 알아봤다면, 지금부터는 BMW의 현재이자 미래, 지금의 BMW를 이끌어가는 대표이사 올리버 집세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올리버 집세(Oliver Zipse)는 1983년 독일 벤스하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솔트레이크시티의 유타대학교(University of Utah)에서 컴퓨터과학 및 수학을 전공하였습니다. 1985년 다름슈타트 공과대학교(Technische Universität Darmstadt)에서 기계공학으로 변경하여 1991년 기계공학 학위를 취득하였고, 나아가 1999년에는 미국 켈로그 경영대학원과 독일 WHU–오토 벤스하임 경영대학원에서 공동 MBA 학위를 취득하여 켈로그–WHU 경영학 석사과정까지 졸업했습니다. 올리버 집세는 1991년 개발, 기술, 기획, 생산 분야의 연수생으로 BMW에 입사했습니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기술개발 분야의 프로젝트 엔지니어로 일했습니다. 1994년부터 2006년까지 뮌헨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개발, 생산, 기획 등에서 다양한 지도자 자리를 맡았습니다. 이러한 지도자 경험을 통해 그는 2007년부터 2008년까지 미니 플랜트 옥스퍼드(Mini-plant Oxford)의 공장장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기술기획실장을 거쳐 2012년부터 2015년 5월까지 그룹 기획 및 생산전략실장에 취임하여 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2015년 5월 13일 올리버 집세는 25년의 기간 동안 BMW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히랄드 크루거전 회장의 뒤를 이어 BMW 경영진에 임명되어 지금까지 BMW 그룹의 생산총괄 사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BMW의 든든한 버팀목, 크반트 가문

슈테판 크반트(Stefan Quandt)슈테판 크반트(Stefan Quandt) 주자네 클라텐(Susanne Klatten)주자네 클라텐(Susanne Klatten)
2019년 1월 기준 독일 최고 부자 순위를 보면, 21조원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슈테판 크반트(Stefan Quandt)와 전 세계 4위의 여성 부호인 주자네 클라텐(Susanne Klatten)의 이름이 올라가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자동차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이 두 사람의 이름을 들어보시지 않았나요? 두 사람은 서로 친남매이자 BMW의 대주주들입니다. 슈테판 크반트는 BMW 25.83%, 주자네 클라텐이 20.9%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크반트 가문은 어떻게 독일에서 최고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BMW를 위기에서 구해낸 인물로 유명한 헤르베르트 크반트(Herbert Quandt)가 아버지였기 때문인데요. 그러면 지금부터 BMW의 든든한 버팀목 크반트 가문과 BMW의 연관성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크반트 가문과 BMW의 연관성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두 남매의 할아버지인 귄터 크반트(Günther Quandt)라는 인물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귄터 크반트는 1881년에 태어나 섬유산업을 통하여 막대한 재산을 보유한 외가 덕분에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귄터 크반트는 사업에 대한 열정과 열망이 뛰어나 기존의 섬유산업에 그치지 않고, 광업회사, 기계 금속 가공 회사를 소유한 것은 물론 자동차 회사인 다임러-벤츠와 BMW의 지분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에 대한 열정이 너무 넘쳤던 탓일까요? 일과 사랑에 빠진 귄터 크반트는 가정에 소홀하게 되고, 결국 마그다 릿챌이라는 두 번째 부인과 이혼을 하였습니다. 마그다 릿챌은 나치당 행사장에서 자원봉사를 하다가 새로운 사랑에 빠져 재혼을 하였고, 귄터 크반트는 그 결혼식을 자신에 소유지에서 치르게 해주면서 대인배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속내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바로 전처를 이용하여 나치당에 가입하여 나치당의 도움을 받으려는 속내였습니다. 이를 이용하여 귄터 크반트는 히틀러가 총재로 당선되자 나치당에 가입하였고, 그가 진행하고 있던 여러 가지 사업에서 당의 도움을 받게 되었으며, 전쟁이 시작되면서 방위산업에까지 뛰어들어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나치당원이자 군수물자를 제공하던 귄터 크반트는 전범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많은 부를 쌓아놓았던 귄터 크반트는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의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헤르베르트 크반트(Herbert Quandt)에게 어느 정도 경영권과 재산을 물려주었고, 헤르베르트는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헤르베르트에게는 자신을 도와주던 조력자가 있었는데, 그 조력자는 바로 귄터와 릿챌 사이에서 태어난 하랄트 크반트(Harald Quandt)였고, 하랄트는 공군 장교로 전쟁에 참여했다가 포로가 되어 1947년 석방되고 난 후 기계공학을 공부했던 경험을 이용하여 헤르베르트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부터 BMW와 크반트 가문의 관련성이 커지게 됩니다. 헤르베르트와 하랄트, 이복형제에게는 다임러-벤츠 주식 10%, BMW 주식 30%가 있었는데, 이 당시 BMW가 벤츠에게 합병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노조에서 자생을 요구하였습니다. 헤르베르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임러-벤츠 주식을 전부 매각하고 그 돈으로 BMW 주식을 매입하여, BMW 주식을 50% 이상으로 늘려 BMW가 합병될 위기에서 구해냈습니다. 그리고 위기에서 구해낸 BMW를 전문경영인들에게 맡겨 지금의 BMW로 성장시켜 내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크반트 가문에게는 수치스러운 과거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나치당과 협력을 하는 과정에서 수용자 재소자들을 불법으로 강제 노동에 동원한 것이었습니다. 가문의 못난 과거를 사과하기 위해 BMW는 2016년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수용자 재소자들을 강제노동에 동원한 것에 대해 깊이 후회한다며 사과했습니다. 슈테판 크반트는 2011년 과거 나치의 수용소였던 곳을 방문하여 강제 노동자들을 위한 기념관을 설립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BMW의 특징

지금까지 BMW의 역사와 이에 관련된 인물들에 대해서 알아봤다면, 지금부터는 도대체 BMW가 왜 전 세계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BMW는 기존에 럭셔리한 고급 자동 브랜드와는 다르게 주요 소비 타깃층을 젊은층으로 잡고 있습니다. 때문에 고급 자동차 브랜드와 비교했을 때 뛰어난 성능과 품질을 바탕으로 하되, 다이내믹한 디자인과 즐거움, 신기술, 효율성 등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BMW는 동종업체와 같은 부피의 엔진이라도 더 높은 출력을 가능하게 하여 운전자에게 주행의 즐거움을 선사하거나, 첨단 기술을 연구하는데 투자를 많이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경쟁업체인 메르세데스-벤츠가 품격과 안정성, 내구성을 강조하는 모습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와 같은 운전의 즐거움과 도전적인 브랜드 이미지로 인해 BMW는 벤츠의 구매 고객층을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더 젊은 고객층을 가지고 있습니다.

BMW 키드니 그릴(BMW Kidney Grille)BMW 키드니 그릴(BMW Kidney Grille)BMW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일관적인 프론트 그릴과 엠블럼을 들 수 있습니다. 우선 BMW의 대표적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론트 그릴은 2개의 신장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키드니 그릴(Kidney Grille)이라고 부릅니다. 키드니 그릴은 1931년 일(Ihle) 형제에 의해 2인승 로드스터에 최초로 시험 도입되었고, 1933년 베를린 모터쇼에서 소개된 신형 303시리즈에 다시 부착됨으로써 BMW를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1955년 3륜 소형차였던 이세타(Isetta)와 1959년 700 모델의 경우 디자인 특성상 키드니 그릴을 장착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당시 BMW의 대주주였던 헤르베르트 크반트가 이사회에서 키드니 그릴을 고수하면서 이후로는 디자인 특성에 맞춰 키드니 그릴의 크기를 조정할 뿐 생략되는 일은 다시 생기지 않았을 만큼 키드니 그릴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BMW에게 키드니 그릴은 ‘함부로 변화를 취하기보다는 끊임없는 진화의 과정을 거쳐 정상에 도달하려는’ BMW 특유의 남부 독일 장인 정신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BMW 로고의 변천사BMW 로고의 변천사

BMW의 엠블럼은 ‘하늘에서 땅으로’, ‘두 바퀴에서 네 바퀴로’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BMW 로고의 유래는 초기에 항공기 엔진을 생산하여 로고의 기본 형태가 비행기의 프로펠러 모양으로부터 형상화되었다는 말도 있었으나, BMW는 공식적인 입장을 통해 독일 바이에른 주정부의 깃발 컬러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BMW의 로고는 항공기 엔진에서부터 모터사이클을 걸쳐 자동차 분야로 확장해온 BMW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독일 바이에른주의 파란색과 흰색이 체크 형태로 교차하는 무늬의 깃발에 영감을 받아 그것을 변형시켜 원을 4등분하여 컬러를 교차하는 식으로 로고를 디자인했습니다. BMW는 엠블럼의 청백색 4등분의 원이라는 큰 틀은 유지하면서 시대에 맞춰서 디자인을 조금씩 변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007 언리미티드에 출연한 ‘BMW Z8’007 언리미티드에 출연한 ‘BMW Z8’BMW의 마지막 특징으로는 영화를 이용한 브랜드 마케팅입니다. BMW는 영화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브랜드 마케팅을 실시하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영화가 바로 007 시리즈입니다. BMW는 007 시리즈에서 주인공 제임스 본드의 본드카로 여러 차례 등장하였는데, 1997년 상영된 007 네버다이(007 Never Die)에서는 BMW 740iL을, 1999년에 상영된 007 언리미티드(007 Unlimited)에서는 BMW Z8을 출연시키며 소비자들에게 다이내믹한 이미지를 부각하여 큰 관심을 이끌어 냈습니다. BMW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단순 PPL이 아닌, 직접 단편영화를 제작을 진행하는 등 더욱 획기적인 마케팅을 시도하였습니다. 2001년 시리즈 영화인 더 하이어(The Hire)를 두 시즌에 걸쳐 총 8편을 제작하면서 단편영화 시리즈형 브랜드 마케팅을 선보였습니다. 이와 같은 마케팅은 자동차 산업을 포함하여 다양한 산업 영역에서 귀감 및 응용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BMW의 역사와 주요인물들 그리고 BMW의 특징까지 알아보았는데요. BMW는 과거 나치당에 관련된 좋지 못한 과거가 있기는 하지만, 그 끊임없는 도전정신과 기업을 위기에서 구해낸 인물들의 결단력은 정말 칭찬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고유의 일관성을 통해 고급스러움을 유지하면서, 다이내믹함과 즐거움을 선사하려고 도전을 계속 시도하는 모습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셨나요? 지금까지 ‘운전의 즐거움, BMW 이야기’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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